산 안드레아 퀴리날레 성당, 로마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 이하 산 카를리노)을 나와 대통령궁 옆을 지나는 한적하지만 긴장감이 느껴지는 퀴리날레街(Via del Quirinale)를 따라 걷다 보면 산 안드레아 퀴리날레 성당(Chiesa di Sant’andrea al Quirinale, 이하 산 안드레아)이 나온다. 두 성당은 200m도 떨어져 있지 않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맡은 다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산 안드레아 설계 의뢰도 성당을 사용할 집단(예수회)뿐만 아니라 교황(알렉산데르 7세) 그리고 유력자(카밀로 팜필리)의 요청이 함께 있었다. 흥미로운 건 베르니니 스스로 성당의 설계대가를 받지 않고 수도원에서 구운 빵 한 덩어리를 매일 받았다고 한다.
산 안드레아는 길을 따라 오목하게 들어간 벽 가운데 있다. 입면의 전체적인 형태는 양쪽 모서리에 건물 전체 높이의 코린트식 기둥과 그 위에 삼각형 부분(pediment)이 있어서 팔라디오 양식(Palladian style)에 가깝다. 반면, 출입구 상부 팜필리 가문의 문장이 있는 지붕과 그 위에 창은 반원으로 설계돼 있다. 압권은 출입구 앞 계단으로 출입구에서 점차 커지는 반원이 마치 수면에 이는 물결 같다. 산 안드레아의 입면은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설계했던 닫집(baldachino)이나 전면 광장 등과 비교하면 소박해 보이지만 그 자체로 정제된 우아함이 느껴진다.
외관의 절제된 느낌은 내부로 들어서면 완전히 바뀐다. 금박과 다양한 색의 대리석 그리고 치장 벽토로 뒤덮인 성당 내부는 화려하고 웅장하다. 심지어 청빈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했던 예수회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예수회 내부에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카밀로 팜필리가 실내 장식 비용을 지불하기로 하자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예수회의 신조를 표현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내부 평면은 출입구와 제단을 연결하는 방향이 짧은 타원형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건축에서는 신자들에게 신의 권위를 몰입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 깊이감 있는 내부 공간을 만든다. 그래서 출입구와 제단을 가급적 멀리 떨어뜨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길에서 오목하게 들어가게 한 뒤 계단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가뜩이나 짧은 출입구와 제단 간의 거리를 더 짧게 만들기 때문이다. 애초 베르니니는 다섯 개의 제단을 만들어달라는 예수회의 요구를 반영하여 오각형으로 평면을 설계했었다. 하지만 이후 타원형으로 수정했다. 타원형 평면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니니는 산 안드레아 설계 2년 전 성 베드로 대성전 앞 광장을 타원형으로 설계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타원형 평면을 통해 가운데 있는 기념할 대상을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성 안드레의 순교’라는 그림이 걸린 제단이 보인다. 어두운 성당 내부에서 유독 그곳만 환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욤 쿠르투아(Guillaume Courtois)의 그림 속에서 성 안드레는 ‘X’자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기 전 천사를 만난다. 천사는 손가락으로 천국을 가리키고 있고 성 안드레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의 손가락을 따라가면 조반니 리날디(Giovanni Rinaldi)가 만든 광채를 표현한 형상과 천사들의 조각이 보인다. 그 위에 정면에서 봤을 때 보이지 않았던 작은 타원형 채광창을 통해 은은하게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제단은 건축을 통해 들어온 빛과 이를 형상화한 조각 그리고 이 둘을 이야기로 담은 그림이 완전체를 이루고 있다.
제단 위에는 그림 속 성 안드레가 방금 나온 듯한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안토니오 래기(Antonio Raggi)가 작업한 조각상은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 그만큼 역동적으로 보이기도 하며 조각상을 받치고 있는 반원형 박공과도 분리돼 보인다. 베르니니도 반원형 박공이 조각상을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급적 줄이기 위해 안쪽으로 오목하게 파냈다. 시선을 위로 조금 더 올리면 타원형 돔과 가운데 작은 채광창이 보인다. 돔에 배치된 아기천사를 비롯한 조각상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올린 성 안드레와 함께 채광창을 통해 들어온 빛을 따라 승천할 것 같다. 산 안드레아에서 회화와 조각 그리고 건축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합주를 이루며 성 안드레의 순교와 승천을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회화, 조각, 건축을 하나로 합치고 가장 잘하는 예술가에게 맡기는 건 베르니니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방법이다. 베르니니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산 안드레아를 설계한 셈이다. 로마에 수많은 조각과 건축을 남긴 베르니니에게도 이 작은 성당은 특별했다.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이탈리아 바로크 예술을 가르쳤던 하워드 히바드(Howard Hibbard) 교수가 쓴『Bernini(1966)』에 따르면, 어느 날 아들 도메니코 베르니니가 성당에 혼자 앉아 있는 베르니니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무엇을 하고 계셨냐는 아들의 물음에 노년의 베르니니는 자신을 짓누르는 의무감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이곳에 온다고 답했다. 산 안드레아는 로마의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니니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위안받는 장소였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서 고대 로마제국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로마에서 고대 유적은 포로 로마노나 콜로세움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다. 오히려 현재 로마에서 볼 수 있는 도시의 모습과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바로크 시대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상당수에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관여했다. 가톨릭은 말을 통해 신자들을 설득시키기보다 신자들이 신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기를 원했다. 특히 교황이 있는 로마를 찾은 순례객들에게는 도시 자체가 체험의 장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는 로마를 웅장하고 역동적인 바로크 도시로 개조했다. 보로미니와 베르니니는 가톨릭의 이런 필요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채워주었다. 로마 곳곳에 흩어져 있는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이 동시대에 활동했다는 것이 어쩌면 다른 누구도 아닌 두 사람에게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의 원본은 주거공간과 라이프스타일 콘텐츠 매거진 브리크 Brique Magazine 97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