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Colosseum)과 로마(Rome)
“티투스! 티투스! 티투스!”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로마 시민들은 황제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황제는 흥분한 시민들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이 환호가 사라지는 순간 황제로서의 지위도 끝난다. 10여 년 전 티투스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황제는 콜로세움 건설을 결정했다. 네로(Nero) 황제의 자살 이후 18개월 간 세 명의 황제가 즉위하고 죽었을 만큼 로마는 혼란스러웠다. 로마 시민들은 이를 수습할 적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선택했다. 평민 출신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권력기반은 오직 로마 시민뿐이었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로마 재건과 함께 황제의 위상도 재정립해야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재정을 건전화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그중 유료공중화장실 설치, 일명 ‘오줌세’는 당시에도 큰 비판을 받았다. ‘오줌세’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내는 세금이 아니라 오줌을 수거하는 섬유업자들에게 매기는 세금이었다. 양털에 포함된 기름기를 제거하는데 오줌 속 암모니아 성분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황제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선택한 방법은 네로와의 차별화였다. 그리고 그 핵심에 콜로세움 건설이 있었다. 황제는 콜로세움의 입지를 결정할 때부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경을 썼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자리는 세 언덕 –카에리우스(Caelian), 에스퀼리노(Esquiline), 팔렌틴(Palatine)- 사이의 평평한 부지로 고밀도 주거지역이었다. 네로는 자신의 재위기간 발생한 대화재로 전소된 이곳에 인공호수가 딸린 황금궁전(Domus Aurea)과 자신을 태양의 신 ‘솔(Sol)’로 표현한 37m 크기의 거대한 청동상을 세우려고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콜로세움 건설을 통해 네로가 자신만을 위해 쓰려고 했던 자리를 로마 시민들에게 내어주고자 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만든 다른 도시 내 원형경기장과 달리 콜로세움은 로마 한복판에 있다.
콜로세움은 로마 시민들을 위한 공공시설이었다. 이러한 역할이 상징에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고안된 건축적 해결책이 ‘아치(Arch)’ 구조체와 ‘콘크리트’ 재료였다. 아치와 콘크리트를 통해 콜로세움은 적은 재료를 사용한 가벼운 구조가 될 수 있었다. 콘크리트는 베수비오(Vesuvio) 산의 화산재를 시멘트로 사용해서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벽돌로 만든 얇은 벽 사이를 시멘트로 채움으로써 건물 자체의 하중을 낮출 수 있었다.
아치는 벽돌이나 돌을 쌓아서 만든 구조에서 개구부의 상부를 쐐기 모양으로 만든 여러 개의 돌을 맞대어 곡선형으로 쌓아 올린 건축구조다. 개구부의 간격이 넓을 경우 상부에 올리는 보(Beam)는 가운데가 부러질 수 있다. 하지만 아치구조는 여러 개의 돌이 힘을 분산하고 석재와 벽돌의 강한 압축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안정적이다. 콜로세움에 사용된 아치는 외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외관의 아치 가운데에는 네로 황제의 궁전에 있었던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외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치와 그 가운데 세워져 있었던 수많은 조각상들을 상상하고 있으면 콜로세움이 ‘아치들의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세상을 뜬 이듬해인 A.D.80년에 완공됐다. 콜로세움에 투입된 막대한 재원은 티투스 황제가 통치했던 예루살렘의 유대 사원 전리품으로 충당됐다. 티투스가 유대 사원의 전리품을 가져오는 장면은 티투스 개선문에 조각돼 있다. 티투스는 콜로세움 개장을 축하하는 축제를 100일 동안 열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기반이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로마 시민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 시민들이 거부한 자신의 애인 베레니케(Berenice)를 아내로 맞지 않았다. 검투사 시합도 자주 열었고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영되어도 책망하지 않았으며, 원로원과의 관계도 좋았다. 훗날 한 역사가의 평가처럼 그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고자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로마 제국 안에는 209개가 넘는 원형경기장이 있었다. 콜로세움은 규모면에서 최대였지만 최초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콜로세움이 중요했던 이유는 위치와 건립 시기 때문이었다. 황제를 포함한 로마의 권력자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 경기를 크게 네 가지 이유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첫째는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 완화
둘째는 시민에 대한 통치수단
셋째는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한 선심
그리고 마지막은 명령 복종 훈련이었다.
그럼 반대로 로마 시민들은 왜 검투사 경기 보는 것을 즐거워했을까?
다민족, 다종교 사회였던 로마제국은 그 다양함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민족, 종교,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황제도 될 수 있었다. 실제 아버지가 노예였던 황제도 있었다. 관객들은 검투사 경기를 보고 열광하면서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하나 된 로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콜로세움은 ‘로마 시민’이라는 이 일치단결의 힘을 로마 한복판에서 끄집어냈다. 단명한 티투스 황제에 이어 즉위한 동생 도미티아누스(Domitian) 황제는 이 흐름을 읽어내지 못했다. 원로원과 척을 지고 공포정치를 펼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결국 암살당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네르바(Nerva) 황제부터 로마제국의 최전성기가 된 5현제 시대가 시작됐다. 5현제 시대 때 로마제국의 영토는 가장 넓었고 로마시의 인구는 최고치에 이르렀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콜로세움은 대경기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기독교 공인에 따라 하나 된 로마는 이제 필요 없는 개념이 됐다. 오히려 신으로 하나 된 중세시대로 접어들면서 콜로세움은 작업장, 요새, 주거지 등으로 변용되었다. 16세기 로마 대개조 사업을 벌였던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는 매춘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콜로세움을 양모공장으로, 200년 뒤 베네딕토 14세(Benedikt XIV)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제 로마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콜로세움에서 더 이상 로마 시민들의 환호성은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콜로세움은 로마가 세계국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몇 안 되는 흔적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