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미술관, 제주
1925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 화백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로 피난을 왔다. 그곳에서 지낸 1년 6개월은 김창열 화백에게 치유의 시간이었다. 이후 그는 제주를 ‘마음의 고향’이라 불렀고 2013년 자신의 작품 200여 점을 제주도에 기증했다. 그리고 2016년 제주 저지리 문화예술인마을 한편에 김창열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중섭미술관’, ‘박수근미술관’, ‘환기미술관’과 같이 특정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지어지는 미술관은 해당 작가를 ‘기념’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관은 그 자체로 작가의 작업세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김창열미술관이 들어선 땅은 작가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건축가는 김창열 작품의 본질을 이해하고 작가의 관점을 담아내는 공간을 설계하고자 했다.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 작가’라고 불릴 만큼 반평생 물방울을 그려왔다.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김화백은 물방울은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못났기 때문에 물방울에 계속 집착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답한 ‘무의미’는 현실의 물질적 존재는 모두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불변하는 고유의 존재성은 없다는 뜻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의미한다. 실제 그는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를 모든 것을 받아들여 다른 것들과 하나로 합쳐 ‘아무것도 없음’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김화백은 물방울을 무심히 보면 모두 같아 보지만 우리 인간처럼 모두 다르다고 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만물의 본성인 공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해 임시로 다양한 만물로 존재하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의미한다.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을 처음 그린 시기는 1972년으로 작품명은 <밤의 이벤트>다. 이 작품을 통해 김화백은 유럽 예술계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물방울의 기원을 유년시절 강가에서 뛰놀던 순수한 마음이라고 밝히며, 제주도에서 피하고 싶었던 한국전쟁의 끔찍한 기억도 물방울에 담겨있다고 했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제라르 바리에르는 2002년 열린 김창열 전시의 팜플렛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담은 화폭이 빗물 말갛게 세안한 듯, 영롱하게 남겨진 물방울의 형상을 적절히 표현했다”라고 평했다. 관람객들이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과 빛에 반사된 표면을 보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이유다.
과학적으로 바라보면 물방울은 수증기나 물이 응결되거나 얼음이 해동될 때 나타난다. 즉, 물은 기체-액체-고체 상태로 순환하는 중간 단계에서 발생한다. 만약 물이 순환하지 않는다면 물방울은 생기지 않는다. 결국 물방울은 물의 순환을 상징하는 셈이다. 각기 다른 기능을 담고 있는 크고 작은 검은색 박스들이 가운데 ‘빛의 중정’을 둘러싸고 배치되어 ‘돌아올 回(회)’자 형태의 동선을 취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물방울의 순환적 상징을 건축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방울을 인지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방울의 형태는 물의 표면 장력으로 생긴다. 특정한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은 물방울을 우리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인지한다. 빛은 물방울 표면에 반사되기도 하고 물방울을 통과해 그림자 가운데를 강하게 비추기도 한다. 반면 빛이 덜 통과된 부분에 그림자가 생기면서 동그란 물방울의 형태가 도드라진다.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의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기 위해 흰색과 검은색을 사용했다.
미술관에서는 ‘빛의 중정’을 가득 채운 빛이 중정을 둘러싼 복도에 뚫린 다양한 크기와 높이의 창 그리고 복도 끝에 설치된 창을 통해 건물 안으로 스며든다. 전시실 내부에는 북쪽을 향한 천창을 통해 은은한 빛이 들어온다. 동시에 미술관 내부에서 관람객이 빛을 더 강렬하게 느낄 수 있도록 복도 내부는 가능한 어둡게 했다. 빛의 극적인 연출은 어둠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추상적인 방식과 함께 ‘빛의 중정’에 분수를 설치하고 빛이 잘 드는 복도 끝과 로비에 물방울 조형물을 놓아 이곳이 ‘물방울 작가’를 위한 미술관이라는 사실을 관람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빛으로의 회귀’라는 제목의 설계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심사위원회는 제주의 자연 지형에 순응하는 형식, 제주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제주석의 재료 활용, ‘빛의 중정’을 활용한 배치구성, 속이 들여다보이는 수장고 계획 등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마지막으로 미술관의 외관을 보면 마치 화산활동으로 융기된 거대한 암석 같은 검은색 박스가 인상적이다. 송판노출콘크리트에 검회색을 칠한 검은색 박스는 높이가 다른데 제주도 풍토 때문에 현무암이나 주상절리가 떠오른다. 검은색 박스는 건물 안으로도 이어져 앞서 얘기한 복도에서 빛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어둠을 만든다.
또한 밖에서는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오는데, 실제 김창열 화백은 건축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담는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경사로를 따라 미술관 입구로 내려와 빛이 극적으로 스며드는 복도를 지나 김창열의 물방울 앞에 서는 과정이 마음 깊은 곳으로 침잠해 내려오는 수행 같다. 김창열 화백은 미술관이 완공됐을 때 달마대사가 10년간 벽을 바라보며 좌선하는 수행을 통해 득도했듯이 자신도 평생 물방울만 그린 보상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결국 김화백에게 물방울을 그리는 일은 참선과 같은 행위였다.
2021년 세상을 뜬 김화백은 그의 소원대로 미술관 인근에 묻혔다. 자신의 작품을 제주도에 기증한 뒤 김화백은 “한국전쟁 때 제주도에 머물며 예쁜 제주 아가씨들에게 마음을 두었다”며, “그 아가씨들은 지금 팔순 노인이 됐다.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잊었지만 제 마음은 고향을 찾은 듯한 느낌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아마도 ‘제주 아가씨’라는 그의 표현은 제주도에 머물 당시 자신의 젊음을 그리워하는 표현인 듯하다. 김창렬 화백은 자신의 젊음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곳에서 영원히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