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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Oct 20. 2022

지지 않을 태양의 집

태양의 집(썬프라자), 서울

꽤 오래전 여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서울대입구역과 신도림역 사이 영역에 대한 이미지가 흐릿한 나는 이 근방에만 오면 길을 헤맨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내비게이션도 없어서 신림동에서 구로 쪽, 즉 북서쪽이라는 대략의 방향 감각만 가지고 차를 몰았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다 어느 교차로 좌측에서 야간조명을 받은 거대한 경사로가 흐릿하게 보였다.

'구로 쪽에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이 있다더니 이거였구나.'
자세히 훑어볼 겨를도 없이 녹색 신호가 떨어졌고 차를 출발시켰다. 5초도 안 되는 순간 내 기억 속에 남은 건물의 이미지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경사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사로가 아니라 조형물이었다.

이후 건물을 차근히 살펴보기 위해 다시 찾았다. 당시 어둠 속에서 자세히 보지 못했던 건물의 재료는 붉은 벽돌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조형물 같아 보였던 경사로에는 서울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마감재가 붙어 있었다. 하늘로 날아가야 할 경사로가 무거운 돌에 눌려 있는 것 같았다. 신중하지 못한 리모델링의 흔적이었다.

김중업, 태양의 꿈을 꾸다.               

건물을 잠시만 둘러봐도 당시 김중업이 원에 꽂혀 있었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원 혹은 타원이 가지고 있는 평면상의 특징은 '내부 완성적'이다. 그래서 '강한 완결성'을 갖는다. 즉, 원형은 외부와의 어떤 관계도 이루지 않고 자체적으로 완성적이고자 한다. 그래서 때로는 다양한 복합시설들이 원을 가운데 두고 배치됨으로써 복합시설이 완결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도록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외부와 단절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번화가에서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상업·판매시설에서 원을 중심으로 한 배치는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김중업은 원의 모티브를 적용했음에도 건축물의 평면을 하나의 원으로 완성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태양의 집의 평면은 기본적으로 건축물이 놓인 대지의 형상인 둔각삼각형을 따랐다. 이는 건축물과 도시 간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대응시키고자 했던 의도와 김중업 자신이 원형이 갖는 특성을 충분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원은 대지의 형상에 맞춘 전체적인 둔각삼각형 평면의 꼭짓점이나 변에 하나가 떨어져 나가거나 덧붙여지고 때로는 연속되면서 만나는 곡선이 변에 부가되기도 하면서 평면상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또한, 입면에 둥근 창을 만들기도 하고 옥상정원의 벽을 날리기도 하며, 심지어는 내부 Y자 동선의 계단홀 벽면에 붙여진 타일이 되기도 한다. 즉, 태양의 집에서 원은 다양한 크기로 흩뿌려져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재미없는 상업시설이 갖는 디자인적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그리고 원이 건물의 파사드facade에 적용됐다는 건 결국 건물의 정면이 길에 미치는 영향 -그 영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을 고려해 설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태양의 집에서 원은 일정한 규칙이나 기준에 의해 배치된 것이 아니라 흩뿌려져 있어서 건물이 전체적으로 산만하다는 느낌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인하는 태양의 집을 "1950년대 중반부터 김중업이 탐구하여 온 많은 건축언어들이 집합된 건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만큼 건축언어가 풍부하지만, 반면에 이들이 서로 통일되지 않아서 산만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시적 울림의 세계(김중업 건축론), 정인하, 시공문화사-).

경사로를 통해 도시의 가로를 건물로 끌어들이다              

건축물 디자인 모티브를 원으로 잡았음에도 기본적인 평면이 대지의 형태를 따른 둔각삼각형이라는 점은 상업시설이 도시와 갖는 관계 때문이다. 즉, 김중업은 상업시설인 태양의 집과 도시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대응시키고자 했다. 이런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건축적 부분이 바로 건물 전면에 설치된 경사로다. 


애초에 건물이 들어선 부지는 김중업과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박치현이 1960년대에 김중업에게 증축과 보수를 맡겼던 신도림 시장이 있었던 곳이다. 결국, 태양의 집을 이용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주 이용객은 부유층이 아닌 건축물 주변에 사는 서민적인 중산층이었다. 때문에 태양의 집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담 없이 들어와 거닐 수 있는 도시의 연속성과 무장애Non-barrier 그리고 서민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친숙함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이런 요건은 김중업에게 수직동선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한 자답으로 1960년대 중반, 이미 '제주대학 본관'에 적용했던 경사로를 끄집어냈다.

하지만 교육연구시설과 상업시설은 건축물이 들어서는 주변 상황을 포함해 매우 다른 여건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태양의 집에 만들어진 경사로의 위치는 건물 전면이다. 상업 건축물에서 전면은 간판이 가장 잘 노출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간판으로 전면을 덕지덕지 다 덮든 특이한 디자인으로 '내가 여기 있소'라는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건네든 건축물은 파사드로 도시와 시민들에게 말을 건다. 그러므로 태양의 집 전면에 만들어진 경사로가 단순히 수직동선에 대한 니즈Needs만 충족시킨다면 상업시설 전면이 갖는 더 중요한 역할을 못하게 되는 셈이다. 이 문제에 대해 김중업은 경사로에 '조형성'을 부여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


현재 태양의 집 동쪽에 설치된 경사로와 그 앞을 지나는 신길로가 만나는 공간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건축물이 완공될 당시에는 지금보다 차가 많지 않아서 이 공간은 공공에게 열린 광장이었다. 보행자는 경사로를 통해 도시의 가로 그리고 경사로가 시작되는 광장에서 건물의 2층과 3층 그리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한때 놀이시설도 있었다는 옥상정원으로 이동했다. 경사로는 태양의 집의 수직동선 기능을 담당하는 건축물에 부속된 하나의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도시 가로의 연장이며, 시민들의 생활과 커뮤니케이션이 벌어지는 활동의 장이었다. 꿈이 잠들다            

상업시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사람들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땅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업시설 자체의 매력도 중요하지만 그 건물이 들어선 지역의 영향력이 상업시설의 성패를 결정한다(입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반대로 얘기하면 어떤 지역에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인이 사라지면, 그 지역에 있는 상업용 건물이 담을 수 있는 용도는 의도하지 않게 바뀔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명확한 목적성이 있는 용도로 흐르게 되는데, 만약 상업용 건물의 층면적이 넓을 경우 예식장이나 찜질방, 층면적이 작을 경우 애견센터 등으로 변한다. 이러한 시설들은 그냥 길을 걷다가 훌쩍 들어와 이용하는 용도가 아니다. 명확한 목적성이 있는 용도다. 현재 태양의 집 2층은 찜질방이고 3층은 예식장이다(방문 당시 기준).

  

태양의 집이 들어선 곳은 건축물을 지을 당시만 해도 공장지대가 몰려 있고 주위에는 저층의 단독주택들이 빼곡했다. 하지만 공장들이 서울 밖으로 나가면서 태양의 집이 위치한 지역의 주변 인구는 줄고 동시에 백화점과 할인마트가 들어서면서 태양의 집과 같은 어중간한 상업시설들의 포지셔닝(positioning)은 모호해졌다. 하지만 상업시설로서의 쇠락을 결정적으로 만든 요인은 아마도 동쪽의 보라매 공원 개발이었을 듯하다. 1986년 공군사관학교로 쓰이다 시립공원으로 바뀐 보라매공원 개발을 통해 공원부지 북쪽과 동쪽에 대규모 업무시설과 복지시설 그리고 롯데백화점을 포함한 대형판매시설이 들어섰다.

그런데 공장 이전적지가 발생하고 거기에 벤처업무시설이나 아파트, 주상복합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40년이 넘은 태양의 집은 그대로인데 주변 상황이 또 한 번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건물은 변하는 주변 상황에 맞춰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런 개발 소식이 들려오면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이런 변화들이 재건축을 부추기는 주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태양의 집이 절대 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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