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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Oct 19. 2022

침묵으로 던지는 질문의 공간

종묘, 서울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종묘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이다. 종묘(宗廟)에 선대왕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사직(社稷)에 나라를 지켜주는 토지의 신 국사(國社)와 곡식의 신 국직(國稷)이 모셔져 있으니 두 시설을 보존하라는 신하들의 읍소는 타당해 보인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정신적 근간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동)과 우측(서)에 배치돼 있다. 동아시아 지역의 왕도를 조성할 때 기준이 됐던《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를 따랐기 때문이다. 서주 시대(기원전 12세기)에 쓰인《주례周禮》와 이후 보완된《고공기考工記》에는 "匠人管國, 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徐九軌, 左廟右社, 面朝後市’라는 내용이 나온다. 뜻은 ‘왕이 사는 도성은 사방으로 길이가 9리이고 네 변에는 3개씩 문을 설치하며, 성 안에는 동서와 남북방향으로 각각 9개의 길을 만드는데 그 길의 너비는 9대의 수레가 나란히 통과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종묘는 좌측, 사직은 우측, 조정은 전면, 시장은 후면에 배치한다"이다. 여기서 좌우전면의 기준은 왕궁이다. 국가의 주요 시설이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태종 이후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 머물렀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대부분 전소된 한양 내 궁궐 중 창덕궁이 가장 빠르게 중건됐다. 조선시대 실질적인 정궁은 창덕궁이었다.


종묘는 창덕궁과 창경궁 남쪽에 인접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역을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그리고 사직 인근에 현재 경희궁과 덕수궁을 함께 일컬었던 경덕궁을 ‘서궐’이라 불렀다. 조선의 왕들이 대부분 창덕궁에 머물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종묘는 조선의 왕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어지러운 당쟁과 번잡한 사안이 벌어졌을 때 조선의 왕들이 비록 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선대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 종묘를 찾아가는 상상을 해 본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에 들어서면 넓적한 돌을 깐 삼도(三道)가 곧게 뻗어 있다. 삼도에서 가운데 길은 양쪽 보다 올라와 있는데, 이는 신을 위한 길(神香路)이기 때문이다. 양쪽 길 중 동측은 ‘임금의 길’이고 서측은 ‘세자의 길’이다. 삼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권력이 함께 나아가는 길이다. 외대문에서 출발한 삼도의 목적지는 정전(正殿)의 정문인 신문(神門)이다. 신문은 삼도를 밟을 수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동문과 서문을 이용해야 한다. 어느 문을 통해 들어서든 가로로 긴 정전과 텅 빈 월대(月臺)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순간 짧은 탄식과 함께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종묘의 정전은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3년이 지난 1395년에 7칸으로 처음 지어졌다. 이후 441년 동안 4칸씩 총 세 번에 걸쳐 증축돼 최종 19칸이 됐다. 정전은 선대 왕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자 국가의 정신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증축될 때마다 그 자체로 완성된 건물이어야 했다. 동시에 이후 왕들의 신위를 더 이상 모실 공간이 없다면 왕조의 끝을 암시할 수 있기 때문에 다음 증축을 생각해야 하는 열린 건물이어야 했다. 즉, 종묘는 조선과 함께 성장하면서 매 순간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증축의 기준은 서쪽이었다. 서쪽은 해가 지는 자리로 죽음과 소멸을 상징한다. 반면, 동쪽은 해가 뜨는 자리이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과 권력을 의미한다. 종묘는 죽은 왕들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니 서쪽이 상석이었다. 그래서 가장 선대 왕이 서쪽 맨 끝에 자리를 잡고 동쪽으로 그 다음 왕들의 위패가 안치됐다. 태조의 고조할아버지까지 추존 4대의 신주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영녕전(永寧殿)이 정전 서쪽에 배치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정전 앞에는 월대가 있다. 사실 정전의 압도감은 월대로 인해 훨씬 커진다. 월대에서 종묘 제례와 같은 의식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빈 상태로 남겨져 있다. 한가운데를 지나는 신로와 불규칙한 박석으로 채워져 있는 월대는 땅보다 1m 정도 올라가 있지만 신위가 모셔져 있는 곳보다는 1.5m 정도 내려가 있다. 땅이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이고 신위가 모셔져 있는 자리가 죽은 자들의 세계라면 월대는 그 중간 영역이다. 산 자의 공간도 그렇다고 죽은 자의 공간도 아닌 월대에서 나에게 가장 편한 자리는 모서리다. 모서리 끝에 서서 월대와 정전을 바라보면 마치 하나의 세계에서 살짝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이 된 듯하다.


월대를 사이에 두고 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있다. 신문 동쪽에 있는 공신당(功臣堂)은 정전이 처음 지어질 때 함께 지어졌으며, 정전처럼 처음 5칸에서 점차 증축돼 현재 16칸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공신당에는 역대 왕들이 재위했을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종묘 제도가 있었던 고려, 중국, 베트남에는 공신당과 같은 건물을 찾아볼 수 없다.

공신당을 건립한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의 건국 과정을 통해 추측해 보면, 군인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전복할 때 지식인 집단이었던 신진사대부의 도움은 절실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들의 지지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었으니 이성계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사실 조선은 왕의 권력과 사대부의 권력이 병존하는 나라였다. 두 개의 권력이 함께 존재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권력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며 견제와 균형을 반복했다. 공신당은 이런 견제와 균형이 만들어낸 결과물 중 하나다.


정전과 공신당 뿐만 아니라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도 두 권력은 서로 견제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왕도는 하나의 절대권력인 왕을 중심으로 모든 시설이 계획되고 조성된다. 하지만 한양은 종묘, 사직, 궁궐, 관아와 같은 주요 국가시설의 배치를 제외한 나머지 계획원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자연의 질서’와 ‘자율의 질서’를 따랐다고 평가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한 나라의 수도가 그러한 질서로 작동했다고 보는 건 너무 감상적이다. 오히려 한양에서 주요 국가시설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을 통제했던 주체는 사대부였다. 현재 한옥이 밀집된 북촌, 서촌 그리고 남촌은 한양으로 이주해온 순서, 계급, 직업에 따라 구분된 사대부들의 거주지였다. 한양의 왕도계획을 주도한 인물도 왕이 아닌 실질적으로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었다. 그렇게 조선의 수도 한양은 왕의 도시이기도 했고 사대부들의 도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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