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 로마
라이벌(rival)은 함께할 수 없는 적(enemy)이 아니라 공생해야 하는 불편한 동반자다. 이런 관계는 ‘라이벌’의 어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라이벌의 어원은 ‘작은 개울을 함께 사용하는 이웃’이라는 뜻의 라틴어 ‘rivális’다. 이탈리아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퀴리날레 궁(Palazzo del Quirinale) 남동쪽에는 바로크시대 로마를 대표하는 라이벌,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77)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가 설계한 두 개의 성당이 있다. 둘 중 북동쪽에 있는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 이하 산 카를리노)은 보로미니가, 남서쪽에 있는 산 안드레아 퀴리날레 성당(Chiesa di Sant’andrea al Quirinale, 이하 산 안드레아)은 베르니니가 설계했다.
둘의 관계는 두 사람보다 한 세대 앞서 명성을 날렸던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에서 시작된다. 마데르노는 가톨릭의 본산,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정면(facade)을 설계하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설계한 평면을 수정한 수석건축가다. 보로미니는 마데르노와 먼 친척 관계였지만 1619년부터 그를 도와 성 베드로 대성전 작업에 참여했다. 반면, 베르니니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황 바오로 5세(Paolo V)의 눈에 띌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베르니니는 재력과 권력을 쥐고 있었던 스키피오네 보르게세(Scipione Borghese) 추기경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성장했다.
마데르노가 세상을 뜨자 교황청 수석건축가 자리가 베르니니에게 돌아갔다. 보로미니는 조각가로서의 실력은 모르겠으나 건축가로서는 자신의 실력과 경험이 월등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도 비슷한 베르니니가 마데르노의 뒤를 잇는 상황이 언짢았다. 하지만 로마에서 자신의 기반이었던 마데르노가 죽었기 때문에 베르니니 밑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니니도 마데르노의 작업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보로미니가 필요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을 함께 작업하는 동안 두 사람은 잘 안 맞았다. 일단 두 사람의 성향이 너무 달랐다. 베르니니는 명민했고 우아했으며 사람을 쥐락펴락할 줄 알았다. 반면, 보로미니는 괴팍했고 고집이 셌다. 심지어 얼마 없는 후원자들과의 관계도 원만히 유지하지 못했다. 보로미니는 대성전에 사용될 대리석 납품 문제로 베르니니와 결별했다. 그리고 첫 번째로 맡은 일이,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설계대가 없이 자청한 일이 산 카를리노였다. 1638년에 착공된 산 카를리노는 3년 후 완공됐다. 정면은 1662년~1667년에 지어졌다. 반면, 산 안드레아는 산 카를리노의 정면이 완성되기 전인 1658년에 착공돼 3년 후 준공됐다. 내부 장식은 1670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산 카를리노의 파동 치는 정면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형태가 워낙 강렬해서 기둥이 받치는 수평 부분(entablature)에 맞춰 기둥이 틀어져 있다는 것도, 상층부 가운데에 오목한 입면과는 반대로 볼록한 작은 건물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위에 타원형 틀(medallion)이 비어 있다는 것도 한 번에 인지되지 않는다. 현기증 나는 곡선의 변주는 건물 안에서도 이어진다.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내부 벽체는 방문객을 향해 밀려왔다 물러난다. 벽을 따라 내부를 한 바퀴 돌면 공간을 감싸고 있는 16개의 기둥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성당 내부는 출입구와 제단을 연결하는 방향이 장축이지만 이전까지 성당 내부를 구성해 왔던 삼랑식(三廊式) 구조는 아니다. 천장의 돔은 타원형이지만 바닥 평면은 모서리가 불룩한 마름모꼴이다. 보로미니는 한 변을 공유하는 정삼각형 두 개로 만든 마름모와 두 정삼각형의 중심에서 그린 두 개의 원을 시작으로 평면을 말 그대로 작도했다. 기하학의 기본 도형인 삼각형과 원은 가톨릭의 중요한 이미지인 성 삼위 –성부, 성자, 성령- 와 하느님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두 도형은 돔 가운데 있는 비둘기를 차례로 에워싸고 있는데, 비둘기는 하느님의 영을 상징한다. 그리고 돔 위에 올려진 첨탑의 창으로 들어온 빛이 환하게 후광을 이루고 있다. 오랫동안 신의 현현이라 믿었던 빛을 통해 하느님의 영과 영원성 그리고 성 삼위가 성당 내부로 내려오는 듯하다.
비둘기 장식 주위에는 팔각형, 육각형, 십자형이 마치 퍼즐처럼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각 형태들은 돔 중앙으로 갈수록 작아지는데 이로 인해 돔은 실제보다 더 높고 깊게 보인다. 성당 정면에서 바라본 장면과 함께 바로크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왜곡된 시점’과 ‘시각적 속임수’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동시에 돔 내부가 오목한 곡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세 도형이 비례적으로 작아지는 형태를 계산한 보로미니의 치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돔 아랫부분에 설치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세 도형의 윤곽선을 따라 만들어진 요철의 명암을 조절한다.
성당 서쪽에는 성당보다 먼저 만들어진 회랑(cloister)이 있다. 회랑의 평면은 모서리를 딴 장방형으로 회랑을 둘러싸고 있는 기둥들은 성당 내외부의 코린트식이 아니라 토스카나식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기둥의 배치와 기둥이 받치는 수평 부분의 처리다. 주두(柱頭)를 공유하는 한 쌍의 기둥은 각 모서리와 긴 변 가운데 배치돼 있고 한 쌍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다. 반면, 회랑 2층은 1층에 비해 기둥이 받치는 수평 부분과 주두의 변화는 없지만 난간의 디테일에 변화를 주었다. 이런 디자인을 통해 보로미니는 작은 공간에서 시도하기 힘든 리듬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바로크양식은 그전에 등장한 고딕양식이나 르네상스양식과 달리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과 순간에 집중했다. 바로크양식에서 ‘아름다움’이란 감각을 통해 주관적인 쾌감을 주는 사물의 속성이다. 그래서 생동감, 활력을 강조했다. 동시에 산 카를리노에서는 베르니니보다 뛰어난 자신만의 건축적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보로미니의 욕망이 느껴진다. 이제 산 카를리노가 완공된 후 베르니니가 작업을 시작한 산 안드레아로 가 보자. 그곳에서 우리는 보로미니의 주장에 대한 베르니니의 응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의 원본은 주거공간과 라이프스타일 콘텐츠 매거진 브리크 Brique Magazine 97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