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팔을 벌리고 있어요.",
장욱진 고택

(2011.4.17, 방글이 4세)

by Archur

방글이가 세 살이 됐을 때 아내와 상의 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아내는 4세까지는 자신이 집에서 돌보고 싶다고 했다. 난 방글이가 외동이어서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 설정을 걱정했다. 이 걱정은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해결해 보기로 했다. 정식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방글이는 문화센터에서 여러 가지를 배워 왔다. 하루는 빈센트 반 고흐 책을 읽고 있는데 아이가 책에 나온 그림의 제목을 띄엄띄엄 얘기했다. 조금 놀라서 -하지만 아이가 천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방글~ 이 그림의 제목은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묻자 "엄마랑 가는 데서 선생님이 알려줬어요"라고 답했다. 고흐 그림 외 어떤 그림을 봤는지 살펴보니 모두 서양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었다. '우리나라 화가들의 그림도 좋은데 왜 서양 화가들이 그린 그림만 가르칠까?'라고 생각해 봤는데 역시나 지명도였다. 그럼에도 방글이에게 우리나라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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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 주말, 방글이를 데리고 용인에 있는 '장욱진 고택(장욱진 미술문화재단)'을 찾았다. 방글이에게 장욱진의 그림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따뜻한 햇살을 맞고 싶은 내 바람 그리고 사람 구경이 아닌 꽃구경을 하고 싶다는 지니의 바람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장욱진 고택의 문을 살짝 열고 들어서자 중년의 남녀가 문살에 창호지를 바르고 있었다. 뭐라고 물어는 봐야겠는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 열었나요?'라는 질문은 가겟집 에서나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개관'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박물관이나 전시관이 아니어서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방글이를 들이미는 게 상책.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저 애기랑 왔는데, 들어가 볼 수 있나요?"였다. 고민 끝에 나온 말 치고는 앞뒤가 조금 맞지 않았다. 어찌 됐든 찻집 안쪽에서 한 여성이 "네~ 그러세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첫눈에도 사진으로 본 장욱진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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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은 1918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1990년 12월 27일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는 다섯 곳에 화실을 마련했다. 그중 용인은 마지막 화실을 차렸던 곳이다. 흥미로운 건 그의 작품 성향과 특징은 그가 화실을 옮길 때마다 바뀌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시기는 1938년 제2회 전국학생미전에서 최고상인 사장상과 중등부 특선상을 수상한 때부터 1962년까지다. 이 시기 중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고 교수를 그만둔 1960년 명륜동 개천가의 초가집을 양옥으로 개조해 작업을 했다. 두 번째 시기는 1963년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한강가에 화실을 짓고 혼자 12년을 생활한 '덕소시대'다. 이후, 1974년 공간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갖고 덕소생활을 청산한다. 그리고 1975년 첫 번째 시기를 보낸 명륜동 한옥에 화실을 꾸몄다. 장욱진 생애 3기, '명륜동시대'다. 1980년에는 충북 수안보 상모면 온천리의 농가를 화실로 고쳐 사용하면서 네 번째 시기인 '수안보시대'를 시작했다. 5년 뒤인 1985년 수안보 화실을 청산하고 용인 땅을 지나다 1884년에 지었다는 한옥을 보고 화실을 차렸다. 그렇게 그의 마지막이 된 '신갈시대'가 시작됐다.


장욱진 미술문화재단에 따르면 신갈시대 장욱진은 "먹그림풍 유화와 풍경이 줄어들고 점차 환상적이며 관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며 파격적인 구도와 자유로운 표현이 최고조에 달한다. 특히 1990년도에는 늘 이야기하던 '삶이란 소모하는 것,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다 쓰고 가야겠다'는 화두에 걸맞게 초탈한 경지의 작품을 남겼다"라고 한다.

장욱진이 이곳으로 이사 온 1986년에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 오고 3년이 지난 1989년 장욱진은 한옥 북쪽에 자신이 직접 설계한 적벽돌 양옥집을 짓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0년 12월 27일 세상을 떴다. 현재 이곳에는 세 가지 시대의 건축물이 공존한다. 찻집을 포함해 ㅁ자 안마당을 끼고 있는 한옥과 그 북쪽에 세 개의 지붕창과 굴뚝이 특이한 벽돌조 건물 그리고 대지 서쪽 끝, 옛 건물들과 충돌하지 않으려는 듯 시멘트 블록을 사용한 현대식 주택이 있다. 참고로 현대식 주택의 설계자는 알쓸신잡3에 출연한 김진애다.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되풀이 내세우고 있는 나의 단골말 가운데 한마디지만 또 한 번 이 말을 큰소리로 외쳐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다."

-장욱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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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은 ㄱ자 평면의 두 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열려 있는 모서리 중 북쪽으로 나오면 축대 위에 벽돌조 건물이 있고 그 왼쪽에 원두막이 있다. 원두막은 이 곳으로 오기 전 장욱진이 머물렀던 명륜동의 원두막을 생각하며 지었다. 원두막 안쪽에는 중국 갑골문자처럼 보이는 장욱진 특유의 글씨체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글씨는 '연못의 물고기를 바라보는 오두막'이라는 뜻의 '관어당觀漁堂'이다. 국문학자 이희승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사실 장욱진 고택에 있는 건물들은 일반적이다. ㅁ자 한옥은 135년이 되기는 했지만 그 당시 흔한 민가였고 벽돌조 건물도 건축적으로 특별하지 않다. 더군다나 벽돌조 건물은 지은 지 30년밖에 안됐다. 그래서 장욱진 고택에서 건축 자체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하지만 한옥과 벽돌조 건물은 시간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품고 있다. 그것도 장욱진이라는 예술가가 함께한 시간이다. 건축 자체에 대한 문화재적 판단을 할 수 없었기에 경기도와 용인시는 한옥과 벽돌조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과 그 시간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가치를 평가할 능력은 지식의 유무라 할지라도 '행정적'인 조치는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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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장욱진 고택을 두고 아파트 재건축에 따른 철거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운동 논쟁이 있었다. 결국 2008년 장욱진 고택은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404호로 등록됐다. 현재 장욱진 고택을 인터넷에서 찾으려면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라고 검색해야 한다. 문화재 의미가 짙은 '고택'도 전시시설을 뜻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아닌 법인을 뜻하는 '재단'이다. 문화재 지정은커녕 미술관 허가도 내주지 않아서 '재단'으로 불린다고 한다. 비록 생가는 아니지만 용인시 입장에서 장욱진은 굴러온 호박이다. 그럼에도 용인시는 장욱진 콘텐츠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2009년 2월 6일 <용인시민신문>에 장욱진의 딸은 다음과 같이 심경을 토로했다. "서울에서 일을 하면 한결 쉽죠. 아마 10배는 쉬울 겁니다. 아버지(장욱진)가 서울에 대한 압박을 싫어해서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장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버지의 그림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이곳이죠. 그러나 아버지와 연관된 장소에서 아버지의 그림을 간직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 몇 번 떠날까 생각했어요. (문화재 등록과 미술관 건립 과정에서) 주민과 마찰이 한창 심할 때,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에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그 현수막을 보고 눈물을 흘렸죠.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버리고 가자고까지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결국 장욱진 미술관은 2014년에 용인이 아닌 양주시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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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고택을 향하면서 식구 각자가 생각했던 한적함, 봄 꽃 그리고 방글이에게 장욱진이라는 화가를 알려 주는 기회는 모두 충족됐다. 더불어 고택 이곳저곳을 손보는 장욱진의 사위와 딸 그리고 마당 한편에서 방글이를 보며 웃으시는 미망인까지 한 번에 만나기도 힘든 그의 식구들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방글이와 내가 거닐었던 고택 이곳저곳에서 장욱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무엇을 바라봤을까? 고택이 있는 땅이 장욱진을 담은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에 가능한 상상이었다.


찻집에 앉아 커피와 진한 대추차를 마시며 비치된 장욱진 도록을 살펴봤다. 그의 그림은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 심플하고 익살스럽다. 방글이도 마치 자기 또래가 그린 그림을 보듯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봤을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방글이와 내가 모두 마음에 들어하는 그림이 인쇄된 엽서 세트와 그의 생애를 다룬 동화책 한 권을 샀다. 동화책은 아이가 더 컸을 때 장욱진을 설명해 주기 위해 구입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가 밥 먹을 때마다 잠깐씩 보고 장욱진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구입한 엽서들을 식탁 유리 아래에 놓았다. 지금은 엽서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동화책은 여전히 방글이 책장에 꽂혀 있다.


설계자: 벽돌조 건물-장욱진(1989), 현대식 주택-김진애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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