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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비문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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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o Choi May 02. 2018

예술가와 매니저

비문

학창 시절,
즐겨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들과의 어울림을 이유로 하던 게임의 닉네임은 항상 '맨날그놈의돈'이었다.


게임 닉네임마저 돈.

그래, 맨날 그놈의 돈이었다.


그 시절, 나는 글도 사진도 아닌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이라는 행위로 나는 '촉망'이라는 꽤나 야시시하고도 부담스러운 수식의 시선을 받으며 찰나의 시절을 보냈다. 그 시선들이 못내 기분 좋아, 흥분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러한 흥분감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하게 된 이유.

그래, 그놈의 돈.


순수한 창작의 즐거움에 도취되기도 전.

나는 흥분감과 그림이라는 행위를 이용해 그놈의 돈을 벌기 시작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창작 플랫폼과 기회들이 지금만도 못하던 시기에 어리숙한 그림쟁이에게 어른들은 가혹했고, 기계화된 공장의 톱니바퀴로 사용하기에 충분했다.


무한이라는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달래던 어른들의 속삭임 뒤로 시계추 소리가 들려, 곁눈질로 시간에게 귀를 기울였다.


시계는 말했다.

돌아갈 수 없다고. 너의 시간은 끝이 있다고. 너는 이제 촉망받지 않는다고.


결국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기능을 잃은 부품 따위가 된 기분.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할 수 없다는 자각과 찾아온 강렬한 격통.

자의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이유로 누구도 탓할 수가 없는, 스스로 버려진 그 격통.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나를 상대로.

미워하다, 억울하다, 울어버린 계절들.


눈물은 시간과 함께 잘도 흘렀다.


그러다 취미로 하던 카메라로 치유하듯 보낸 10년.

가지가지 파릇한 예술가들을 만났다.


강산도 변했고, 과자 값도 변했는데, 예술인들의 삶은 여전히 퍽퍽했다.

같이 살아내고 싶었기에, 지갑과 인맥을 쥐어짜 도생을 도모했고 다시금 희망을 찾는 여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자본의 투입 없이는 세상에 보일 수 조차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들.


울며, 신나를 한통 들이마시는 기분으로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지루한 미팅이 연속되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여정.


하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어리숙한 아이였으며

그들은 지나치게 똑똑한 어른들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잘도 놀아났다.


법치를 운운하며 겁을 주던 어른들은 미완의 존재들 위로 자신들의 상표를 붙여 팔아먹었다.


함께 미워하다, 함께 억울하다, 함께 울어버린 계절들.

눈물은 혼자던, 함께 던, 시간과 함께 잘도 흘렀다.


그렇게, 몇 년.

뿔뿔이 흩어진 미완의 예술가들의 소식을 듣다, 고개를 '탁'하고 젖히다, '퍽'하며 숙여버렸다.


현혹되기 충분할 이름의 관리자 즉, '매니저'라는 딱지.


씬을 뒤집겠다고 생난리를 치며, 조던의 에어로 날아다니던 래퍼도 매니저.

뼈가 박살 나던, 말던 가슴으로 팝핀을 튀기겠다던 댄서의 가슴팍의 벳지도 매니저.

노트와 펜 하나만 있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던 활동가 겸 작가도 넥타이를 동여맨 매니저.


시발.

담벼락에는 슈트와 타이 그리고 벳지로 대동 단결한 매니저들이 돈으로 인생을 논한다.

시발.

담벼락에는 하루 한 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고객의 충실한 개가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전직 예술가들이 넥타이로 모가지를 졸라맨다.


이게, 진짜 시발이다.

시발 같은 인생의 시발점.


시대가 말했다.

자본량에 따라 행복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

원빈이 말했다.

웃기지 마. 그깟 사랑돈으로 사겠어. 얼마야? 얼마면 돼.


시대가 말한 것처럼. 원빈이 말한 것처럼.

물질과 비물질 간의 교환이 가능한 것이라서,

그 등가교환이 성립되는 거래 양식이라서.

그래서, 그런 거라서.


씬을 포기하고,

팝핀을 포기하고,

글 쓰기를 포기한 채,


매니저로 대동 단결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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