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이야기
숲 인문학자이자 숲의 철학자이신 김용규 대표님의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강연을 만났습니다.
상처가 없는 생명을 본 적이 없지만, 이 상처를 대하는 모습이 자연과 인간은 상이합니다.
인간은 상처 입힌 '가해자'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가해자를 원망하고, 때로는 내 삶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며 가해자를 내 인생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함께' 지냅니다. 내 망가진 삶의 책임이 그 가해자에게 있다며 원망하고, 망가진 삶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 키는 왜 이렇게 작은지. 왜 내가 여기 키 큰 나무들 사이에 살아야 하는지. 나도. 다른 나무들도 원망치 않고 관계 속에서 어떻게든 꽃피우고자 노력합니다. 상처가 났다면, 상처에 다시 새순이 돋게 합니다.
그 상처 치유 물질을 우리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쉽게 발견하지 못합니다. 남을 원망하고 나를 상처 입힌 그 가해자에게만 집중하느라, 정작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회복 탄력성' 은 잊고 마나 봅니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자기를 회복할 힘이 내재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자연은 자기가 아닌 상태로 사는 존재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너. 너로 살아라."
자연이 우리에게 해 주는 말입니다.
"삶에서 경험한 모든 길은 자연과 닮아 있습니다."
강연을 듣다가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요즘 저는 뭐 이렇게 잘 감동할까요?
오동나무는 숲의 가장 자리에서 태어난다고 해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숲의 가장자리.
민들레에게는 빛이 더 중요하니 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고요. 산삼에게는 빛보다 양분이 더 중요하니 산속 싶은 곳. 양분이 많은 곳에 살아요. 그런데 오동나무는 빛도 양분도 모두 필요하대요. 그래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숲의 가장자리에서 산다고 해요.
숲의 가장자리에서 혼자 우두커니 잘 자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주변 식물들이 오동나무 혼자 자리를 차지하도록 가만히 놔두진 않겠지요.
그래서 오동나무가 자라는 곳으로 다른 나무들이 가지를 쭉쭉 뻗어내기 전에 오동나무는 속성으로 자라야 한대요.
빨리. 빠른 속도로 자라야하기 때문에, 오동나무는 잎자루도 광합성을 해서 초록색이고요. 잎도 빛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기 위해 저희 얼굴의 4배나 되는 엄청난 크기로 자란다네요.
(그래서 예전엔 오동나무를 우산 삼아 비를 피하기도 했답니다) 잎이 이렇게나 크다 보니.... 속성으로 자라다 보니, 단단하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시죠?
그래서... 오동나무에게는 태풍이 쥐약이랍니다. 태풍이 불면, 속성으로 자란. 잎이 큰 오동나무는 거센 바람에 금방 쓰러져 버릴 테니까요. 그렇다고 바람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어도 오동나무에게는 큰일이지요.
바람이 있어야 살 수 있는데, 또 이 바람이 문제이기도 하니 오동나무는 바람과 화해하는 법을 스스로 찾았답니다.
오동나무 나이테를 보면 속이 비워져 있대요. 속을 비워서 바람이 오면, 바람에 맞서지 않고 자신의 몸이 흔들리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오동나무에 바람은 내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요. 그저 관계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것이든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자연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존재의 모습이라는 것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인연의 관계로 기인한 것이기에 모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변의 것은 없기에 그저 판단은 보류하고. 있는 그대로. 지금. 바로 여기에 충실히 살아라는 말인가 봅니다.
그러니,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이분적으로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나와 타인에게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잣대를 들이대어서도 안됩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안아주어야 함을 자연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동나무가 바람과 화해하는 법을 스스로 찾았듯이. 자연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원망하지 않으며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나를 바로 세우며 나와 주위를 끌어안으며 '동사'로 살아가야겠다 마음먹어봅니다.
숲이 알려준 길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아야겠습니다.
어제 보다 조금 더 깊이 걸어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