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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ndtic Hannahism Sep 08. 2023

왜 나는 그것이 갖고 싶을 까?

현상을 그저 막으려 하지 말고 나를 마주하며 왜 그러한지 살펴보기

사실 내 부족한 모습과 마주한다는 것은 항상 거친 사포에 피부를 문지르는 것처럼 따갑고 불편하다. 과도한 자책은 핏방울이 맺히도록 나를 다듬는다. ‘절차탁마’는 내게는 오래된 미덕이고 버릇으로 그다지 괴롭지는 않으나 적당히 사포가 아닌 거울이나 좋은 천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는 말을 듣고 있다. 몸에 난 상처들을 바라보며 나는 흠 없기 바라고 남들이 보기에 혼낼만한 것이 없기를 바라며 강박적으로 해왔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수많은 흉터가 되어 누군가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것으로 마치 천에 흩뿌려진 검은 오염 자국같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왜 특정 소비를 강하게 원하는 가? 

 “아껴 써야지. 돈을 모아야지.” 하는 평면적이고 단순한 다짐 말고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해본다. 드러나는 증상을 막으려고 하기보다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아야 그것이 제어할 것인지 자연스러운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 내가 그러한 소비에 집착하는지, 그것이 집착은 맞는지, 아니면 내 나이의 생물학적 여성에게서 나오는 정상범위의 원함 수준인 것인지…]

내게는 그런 것을 판별할만한 리트머스 종이가 없다. 내 또래가 부재하기 때문에 물어볼 곳도 대조할 만한 이도 없다. 진료실에서 인생에 한 번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는 말을 들어도, 좀 지르는 것도 괜찮다는 말을 들어도 별로 마음에 신청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합당한 근거 없이 그저 주관적 판단으로 나를 안위해 주기 위해 하는 말인지, 정말 내 경제적 상태에서 괜찮아서 하는 말인지 (알 턱도 없지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내 통장에 만원밖에 없는 데 신카로 100만 원을 긁었다고 가정하고 

누군가가 ‘인생에 한 번쯤 그래도 괜찮지! 잘했어!’라고 할 때 ‘맞아 그럴 수 있지!’ 하고 나도 거기에 맞춰서 문제에 ‘그럴 수 있지’ 쯤으로 대한다면 그게 옳은 가, 자기기만이 아닌 가하는 그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조언을 부수적인 서브 정도로 생각하고 한쪽에 옮겨서 두고 듣게 되었다. 모든 것은 다 내 속에서 ‘과연 그러한 가?’하고 그 말을 검정한다. 이전에는 검토 없이 수용하고 누가 규정하거나 이야기해 주면 그것에 다 맞다 생각했지만 서른 살이라는 분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체적으로 자기 경험을 바탕을 두고 하는 확증편향된 의견에 가깝고 출처는 없으나 확신에 가득 찬 것들로 타인을 계몽하려고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 나는 다른 가? 나도 그러한 경향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나를 가르쳐야 한다. 가르치기 어렵다면 내가 바라보기 어렵고 창피한 것을 마주하면서 내가 왜 그러한 것에 못난 집착이나 강렬한 욕구를 갖는지 살펴보아 내 마음이 무엇을 잃고 혹은 무엇을 과도하게 발현하고 있는지 알아봐 주어야 한다. 


오늘 그러한 시간을 좀 많이 가졌다. 

지난 5월부터 패턴을 보고 사 모은 것들을 따져 보면서 내가 어째서 이렇게 많이 바라는 가 생각했다. 

[립글로스, 파우더, 아이섀도, 글리터, 속눈썹, 원피스, 향수, 헤어제품, 로션, 스킨, 샤워젤 …]

약간의 경향성이 있었다. 그저 마구잡이로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소거되었던 여성성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이 조금 느껴졌다. 나도 여자로 아름답고 싶다는 생각이 근원적으로 있었고 그것이 치료와 다이어트로 더불어 발현되고 있던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성은 워터하우스나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속에 나오는 상당히 하얗고 가녀리며 연약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들이다. 내 시선에서 그들은 어리석어 보이지도 않고 어떠한 문학적인 역량도 있어 보였다. 그러한 이미지를 채우기 위해서는 머리카락이 흑단같이 검고 부드러워야 하며 피부가 희고 고우면 좋고 적절히 좋은 향이 나며 주변을 항상 청결하게 해 두는 것이 좋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은 저절로 자연적으로 원래 그러한 것처럼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유지 또한 까다롭다. 우리 신체가 외부스트레스에 대하여 항상성을 유지하듯 계속해서 가꾸어야 하는 것들이다. 하루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아름다워졌다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인 것이다. 머리에는 맞는 에센스와 오일을 바르고 피부는 주기를 두고 각질을 벗기고 스킨과 로션을 잘 맞는 제형을 따져서 때에 따라 덮어줘야 부드러움이 남으며 그 위에 그날에 맞게 향기로 마무리하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아는 나를 만족하기 위한 여성성이 생성된다.


나에게 꾸민다는 것은 사실상 금기시되던 것으로 20대 초에 처음 귀걸이가 하고 싶어서 귀를 뚫었을 때, 좋은 재킷을 샀을 때, 예쁘다는 말을 순수하게 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해서 뭐 할래?’ 하며 힐난하고 조롱하는 것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하면 죄짓는 데로만 빠르게 걸음 하지 않겠느냐 하고 가르치는 소리는 24살에 로션만 바르고 다녀 겨울에는 얼굴이 터서 같은 연구실 선생님이 남자도 로션만 바르고 다니지 않는다며 좀 더 바르라는 꾸중을 듣게 하고, 32살의 서랍에 립스틱 2개와 아이섀도 팔레트 1개 파우더쿠션 1개만 갖고 있게 하였다. 처음 이곳에 이사 온 날, 이사를 도와주시던 아저씨께서 아가씨 집에 신발이 3개만 있는 것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셨다. 


절제와 검소가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라고 착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4월에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대하면서 ‘나는 왜 원하면 안 되는 가?’, ‘원함의 봉사함으로 의지를 갖게 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내 손에는 망치가 없지만 수많은 생각들을 그렇지 아니하다 하고 싸워 부수었고 나도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들으면서 독소전쟁 속에서 오펜하이머의 핵폭탄 보다 강렬한 음악이 주는 인간다움의 힘을 느껴보았고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이 좋아서 한동안 매일같이 교향곡을 들었다. 이처럼 전에는 추구하면 안 될 것 같았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이제는 나도 갖고 싶은 한 가지, 깊이 원하는 것이 되어 소비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왜 이리도 사고 싶을 까? 왜 저 로션이 갖고 싶을까? 하는 물음에 그저 

'내가 충동적이라 그래. 내가 PTSD라는 큰 복잡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라고 증상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헨델과 그레텔이 남긴 빵조각을 따라가듯이 짚어 가보았다. 상실한 여성성과 새로 원하게 된 여성성을 갖추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내가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여성상이 현대의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고 부적절하다고 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원한다. 라나 델 레이의 11년 전 모습이 아름답고 모니카 벨루치의 검고 긴 머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그런 여성상은 좋지 않다 해도 내가 원하고 내가 좋다면 그것은 내게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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