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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ndtic Hannahism Sep 09. 2023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자 한다면 될 수 있을까?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가 들고 오는 명령

종종 자기 전에 생각을 한다. 

전부 스스로의 찬란함을 흩뿌리고 사는 가운데 나같이 볼 것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빛 가운데 지낼 수가 없다고. 그래서 그 빛에서 뒤돌아 나처럼 보암직하지 못한 것들이 열심히 배우고 살아가며 타인에게 환대하고 

인간이 인간다움에 열렬하기를 끝까지 하기로 결심한 것들에게 사랑을 주기로 하였다.


두들겨 맞아 피가 흥건하여 거반 죽어있던 강도 만난 자에게 '내가 너를 도와주랴?' 묻지 아니하고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덮고 여관에 맡기고서는 '더 여비가 들거든 이 돈을 쓰시게' 하고는 여관장에게 돈을 더 주고 떠난 이는 이스라엘이 상종하기 싫다 규정한 사마리아인이었다. 


누가복음에 한 청년이 예수에게 다가가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냐고 그러자 예수는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누가 자신의 이웃이냐며 다시 묻는다. 그리고 모두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해준다.


사람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그처럼 되어야지 하고 쉬이 생각하지만 그 시대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상종 못할 짐승과 같은 존재였다. 가나안에 있던 사마리아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이 들려 예수한테 다가가 제발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 외치자, 예수가 말하길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그들은 심지어 같은 시간에 우물물을 퍼 올릴 자격이 없어 남들은 더워 피하는 오후 3시에나 물을 뜨러 나서야 했던 혐오의 종족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남편이 다섯이었던 사마리아여인을 만나러 그 더운 시간에 우울가로 간 것이었다. 


그러니 쉬이 나도 사마리아인이 되겠다 하겠다면 스스로 미워버리운자가 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스스로가 부정하고 흠많은 사람이어야 강도 만난 자를 보며 측은지심을 갖고 도움이 필요하냐 묻지도 않고 당연히 필요함을 알고 돕는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생각이 났다. 우리에게 강도 만난 자와 같은 '타자'는 나에게 괴로움을 호소하고 명령을 얼굴로 드러내는 존재이다. 타자가 얼굴을 가지고 우리에게 명령으로 다가올 때 '곤고하고 굶주리고 괴로운 자를 보살필 의무'를 어떤 이는 거절할 것이라 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타자의 얼굴이 말하는 명령에 순종하여 의무를 행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 사람의 어떠한 것이 곤고함을 책임지라는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바로 역지사지하는 '나도 그 위치에서 곤고함을 느껴보았노라. 나도 괴로웠노라' 하며 그 아픔을 체휼 해본 사람이 콩 한쪽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번 생각하자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이 강도 만난 자처럼 미워버림바 되어 상처가 많아 무엇이 타인에게 필요할지 상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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