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시적 소장품'에 다녀와서
우리는 저마다의 구슬을 가지고 있다.
이 구슬은 존재의 일부
혹은 자신이라는 세계를 이루는 무언가
또는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구슬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팔찌나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를 만들 수도 있고, 옷이나 가방에 달 수도 있다.
얼마 전 담수 진주 목걸이를 사기 위해 한 가게를 갔다. 그 가게는 목걸이를 파는 곳은 아니었으나 이전에 목걸이를 봤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찾아갔다. 사람들은 가게의 의도에 맞게 탐스러운 접시와 컵, 소품들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울퉁불퉁한 작은 진주로 꿰인 구석에 있는 목걸이가 마음에 들었다. 너무 촘촘하지도 않게 적당한 간격으로 꿰어져 있었고 내 목에도 알맞게 어울릴 것 같았다.
그 목걸이를 계산대에 내밀었고, 직원은 그 목걸이를 향해 낯선 눈빛을 보냈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게 이 물건은 새 상품이 없다며 그래도 괜찮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목걸이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목걸이를 보는데 사람들의 손을 탄 흔적이 보였다. 특히 목걸이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후크같은 것이 보였다. 반대편의 끝과 연결해 주는 고리였다. 당장 목걸이를 하는 데 문제는 없겠으나 목걸이를 잘못 뺐다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 목걸이를 샀다. 너무 불쌍해서. 나 같아서. 직원이 재차 물었다. 정말 괜찮겠냐고.
신경희 작가의 '퀼트' 작품 설명에 다음의 문장이 있었다.
'이미지들은 작가 개인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해독하기 어려운 기호와 같은 것이다.'
이 문장을 보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작품 '퀼트'를 보면 의미를 쉽게 알기 어려운 사물들이 그녀가 직접 만든 종이 위에 올려져 있다. 아마 그 사물들은 그녀에게 있어 그녀를 이루는 존재의 일부 혹은 자신이라는 세계를 이루는 일부 또는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지금은 내 목에 걸린 목걸이의 고리일 것이다.
사물들을 왜 그렸는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2017년 세상을 떠나셔서 그 가능성은 더 희박하다.) 누군가는 이상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꿋꿋이 처음부터 종이를 직접 만들고 종이 위에 사물을 얹고 그 종이들을 한땀한땀 꿰어 자신을 이루었다. 내가 낯선 눈빛에도 꿋꿋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진주 목걸이를 사서 내 목에 나의 일부러 가져온 것처럼.
그렇다면 이 그림은 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일까.
내가 그 앞에서 울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하나의 작은 세계에 어떤 동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