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는 했지만 아직 용서는 못했다
심신의학 창시자이자 인도계 미국인 연설가인 디팩 초프라는 자신의 저서 <디팩 초프라의 완전한 행복>에서
"지속적인 행복은 환상에 불과하다.
기억력과 상상력을 지닌 인간은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인간은 과거의 상처에 허덕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괴로워한다.
인간 외의 동물에게도 기억력은 있지만 발에 차인 개가 인간과 달리
십 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지는 않는다"
라고 말했다. 남편, 아내가 자꾸 과거의 일을 꺼낸다. 그럴 때마다
"또 과거 얘기를 왜 꺼내는 거야.
지겨워.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또 그 얘기야?"
분명 그때 화해 잘했고 다시는 안 꺼내겠다더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중앙대 심리학과 현명호 교수는 사람이 누군가를 용서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100명이 넘는 실험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현명호 교수는 두 그룹으로 나눠 여러 가지 사건들을 들려주고 A그룹에는 '1개월 전', '6개월 전', '1년 전'처럼 특정한 과거 시점에 일어난 일을 정확한 기간을 숫자로 말해주었고 B그룹에는 특정한 과거시점이 아닌 '매우 오래전', '오래전', '최근에'처럼 추상적인 시간으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숫자로 정확한 기간을 말해 준 A그룹은 모두가 "용서할 수 없다"라고 답했으나 특정 과거 시점을 말해주지 않았던 B그룹은 A그룹에 비해 용서에 대해 더욱 너그러운 반응을 보였다.'1년 전 일'이라고 하면 용서가 안 되는데 '오래전 일'이라고 생각하면 용서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얼마나 오래전의 일처럼 느끼는지에 따라 잊어버릴 수도 있고 여전히 어제 일처럼 느낀다면 용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 십 년이 지난 이야기를 아직도 품은 채 수시로 꺼내는 배우자라면 늘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직도 난 그 일이 생생해"
"수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어제 일처럼 느껴져"
<한 번쯤 이혼할 결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이혜정선생님 부부.
(요리연구가이시지만 동치미에서의 모습이나 이 프로그램에서나 상담도 잘하고 자기 인식과 관리가 잘 되어 계신 상담전문가 같아 개인적으로도 좋아한다)
아내가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직접 데리러 와 노래방까지 데려다주는 남편. 프로그램을 통해 가상이혼을 하면서 남편의 변화를 보며 아내의 마음도 조금씩 열린 듯한다. 아내는 남편이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너무 잘했던 과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칭찬한다.
그런 아내의 칭찬에 남편은 입가에 미소를 숨기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지인들에게
"부부싸움의 70퍼센트는 이 사람이 일으키거든"
이라는 말을 하자 마음에 응어리가 생긴 탓인지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과거 이야기를 지인들 앞에서 꺼내 놓는다. 남편은 아내의 지인 앞에서 민망했던지
"누가 각본 쓴 거냐"
며 더 이상 아내가 말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지만 아내는 말을 계속 이어간다. 남편은 인터뷰에서
"내가 몇 번을 얘기했다.
그거 얘기해서 재밌어? 재미없대.
그러면 하지마 했더니
안 한다더니 또 하길래 바보 같은 인간이네 그랬지"
자막도
"그녀는 왜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했을까?"
라는 문장을 띄운다.
아내는
"늘 해결되지 않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한테는 하나의 병이자 증상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일들이에요.
내가 조금 사는 게 힘들거나,
되게 감정적인 부분이 거슬릴 때에는 탓을 하게 되는 고질적인 병이 있는 거죠.
말할 수 없는 저 혼자만의 뭐라고 할까요. 풍랑 같은 거예요.
화해는 했지만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
그 일을 꺼내지 조차 못하게 화고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려서 지인들 앞에서 이야기하게 됐다"
라고 말했다.
남편은 인정, 존중, 칭찬, 감사, 존경을 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고 아내의 상처받은 과거의 마음을 더 인정해주고 싶지 않은 부정의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부부문제 중 가장 해결이 어려운 것이 외도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나도 같은 경험자로 서로 지옥 속에서 살게 될 것 같은데 유책배우자인 상대는 그렇다 쳐도 내가 나를 지옥 속에 가둬놓고 툭하면 의심하는 의심병환자로 살고 싶지 않아 이혼을 선택했다.
하지만 외도사실을 알고도 이혼을 결정하지 않고 잘 살아보기도 했다면 부부는 제대로 된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 제삼자가 있지 않은 곳에서 오롯이 부부가 단 둘이.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나서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하나하나 뜯어 짚어주어 주길 원했지만 남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수 십 년이 지나고 다시는 꺼내지 말기로 했어도 나의 감정을 건드릴 때마다 불쑥 과거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대신 아내도 남편을 비난하거나 그날의 일을 하나하나 풀려하지 말고 그때 느낀 그 감정을 이야기하고 존중받도록 하는 것이 좋다. 외도사실을 목격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빌기보다는 회피하거나 휴대폰에서라도 증거를 찾았다면 왜 그걸 열어봤냐며 적반하장으로 되려 소리치며 상대 탓을 하기 바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외도를 하고도 인정하지 않고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들은 그 이유 중
하나가 '수치심' 때문이란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인지하면서도 저지른 일인 데다
철저하게 숨기려 했던 것을 상대에게 들키면서 부끄러움? 치부?
이 말이 맞지는 모르겠지만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자주 꺼낼수록 그 수치심을 마주하게 만드는 상대에게
그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막고 싶은 마음이란다.
그럴수록 두 부부 모두 다 드러내놓고 제대로 끝내야 한다. 매번 똑같은 과거 이야기를 소환해 평생 들으며 도돌이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면.
외도행위자가 부부 중 있다면, 과거의 큰 잘못을 했다면, 혹은 과거의 일을 자주 배우자가 꺼낸다면 제대로 마주하고 제대로 끝내버리자. 상대 배우자는 잘 견디고 살다가도 자신한테 조금만 서운하거나 내 감정이 긁혔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의 과거 잘못들을 무기처럼 꺼내고만 싶은 마음이 든다. 오늘은 과거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다행인 것이 아니라 오늘도 과거 이야기가 스멀스멀 병, 증상처럼 올라오는 것을 그저 참았을 뿐이다.
이미 종영한 JTBC 드라마 <대행사>의 주인공이 이런 대사를 뱉는다.
"습관 된다.
두렵다고 피하는 거.
긴장되면
긴장된 상태로 이겨 내야지.
피하는 거 습관 되면
나중에 트라우마 돼"
아내가 "예전에~" 라고 말만 꺼내도 "왜 또 과거 얘기 하려고?" 라며 트라우마처럼 지옥 속에 살지 말고 반복되는 같은 과거 이야기에 더 이상 소환 당하고 싶지 않다면 제대로 헤아려주고 인정하며 사과하자.
어디 상처가 소독 한 번 했다고 쉽게 없어지나.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수시로 소독하고 새살이 올라오도록 연고도 발라주고 흉터가 될 만큼 깊게 파인 상처라면 흉터관리도 필요하다. 그러면서 흉터는 서서히 옅어지기도 한다. 영영 지울 수는 없다. 이미 생긴 상처와 흉터는 자국이 남기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수년, 수 십 년을 묵은 상처가 제대로 재활도 못 받고 흉터도 치료, 관리하지 못했다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늦은 재활이라도, 이미 생긴 흉터지만 그 흉터를 가릴 수 있는 반창고라도 붙여주며 계속 마음을 다독여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깨끗이 지워지길 바라며 다시는 꺼내지 않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이기적인 내 욕심이지 않았을까.
나는 남편에게 서운했던 과거의 일을 계속 꺼내며 괴롭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갈등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 중에 한 번도 표현하지 않고 혼자 꿀꺽 삼킨 마음이 저 구석 어딘가에 남아있음을 안다.
혹시나 툭하고 감정적으로 뱉어낼까 봐 언젠가는 함께 해소해야겠단 생각으로 날을 잡았다(?). 일단 유튜브로 안정적인 '마음이 편안해지는 음악'을 틀고(음악이 나의 목소리 톤은 낮게 하고 천천히 하게 해 남편도 나도 부정감정 데시벨이 높아지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 남편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마주 보면 적대적 관계로 무의적으로 인식해 다툼이 크게 될 수 있기 때문) 잘 먹지도 않은 와인 (소주 먹으면서 말하면 소주처럼(?) 말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되며 천천히 취하는 와인을 마심)을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자기야. 내가 과거 이야기를 끌고 와서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니지?"
"응, 그렇지"
"근데 내가 과거에 있던 일이 행여나 언젠가 툭 하고 튀어나올까봐
오늘 이야기하고 깨끗이 털어버려서
내 마음이 자기한테 서운함 하나도 없이 사랑만 있었으면 좋겠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 (결정을 남편에게 주는 물음표화법)"
"그래해봐"
"나도 자기를 비난하거나 탓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자기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를 말하고 싶다면
내 마음부터 헤아려 주고 그럴 수 있었을 거라는 인정의 말을 먼저 해준 다음에 말해줄 수 있을까?
그럼 나도 부정적인 감정 없이 자기 말을 듣고 뭐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그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음악을 틀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여유로움을 갖으며 천천히 마시는 와인덕에 좋은 말로(?) 시작해 좋은 말로 끝났다. 남편은 자신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 자신은 자신만의 생각으로 누군가와의 의논보다는 혼자 결정하고 통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충분히 나를 서운하게 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줬고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헤아려주며 사과해 주었다.
우리는 진짜 제대로 된 화해를 했고 용서라고까지 할만한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의 마음에 남은 속상함이 채워진 쓰레기통을 그제야 비울 수 있었다.
나의 과거의 아픔이 지금까지 자리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쓰레기통의 주인을 제대로 찾아 해결해야 한다. 쓰레기통을 비운다고 쇼핑, 여행, 제삼자와의 수다를 떨어봐도 잠깐은 효과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대로 비우지 못한다. 또 나의 과거의 부모, 동료로부터 쌓인 쓰레기통을 비우지 못하고 남편, 아내에게 그 쓰레기통 안에 것과 비슷한 말과 행동이라며 과거의 과거를 묶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봐야 한다.
한 아이가 엘리베이터에 엄마와 함께 탔다. 재잘재잘 말을 잘하는 아이가 예뻐 함께 엘리베이터를 한 이웃이 말을 걸었다.
"어머 너 정말 말을 참 잘한다.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니?"
"우리 엄마는 제게 늘 좋은 말만 해 주시거든요."
"그래?
엄마가 무슨 좋은 말을 해 주셔?"
"좋은 말로 할 때, 밥 먹어라.
좋은 말로 할 때 신발 신어라."
'좋은 말로 할 때'라는 말은 감정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는 상태, 지금은 참을 수 있는 그야말로 좋은 말로 할 수 있는 상태다. 해묵은 감정을 스스로 내 안에 쓰레기로 쌓아두면 안 된다. 쓰레기는 쌓일수록 고약한 냄새를 풍길 뿐이다.
참았다 터트리지 말고 상대배우자에게 좋은 말로 할 수 있을 때 해라.
과거가 자꾸 쌓여 또 폭탄처럼 터지고 터지기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집안 공기가 평화로울 때조차도, 남편, 아내가 '좋은 말로 할 때' , '내가 좋은 말로 할 수 있을 때' 서로에 대해 잘 인식하고 그 마음과 감정은 헤아리고 인정하며 공감하고 존중해 주자.
화해는 했지만 아직 용서하지 못했거나, 용서받지 못해 자주 과거로 소환당하고 있다면 쓰레기통을 품은 사람과 그 쓰레기통의 주인은 과거를 모두 꺼내놓고 제대로 감정을 해소하며 이제 감정쓰레기통을 깨끗이 비워내도록 하자.
앞서 디팩 초프라는 "기억력과 상상력을 지닌 인간은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했지만 '좋은 기억'은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러기에 인간은 꼭 고통에서만 허덕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혼 없이 행복한 부부의 삶을 위해 과거의 기억과 불편했던 서로의 감정을 서서히 지우는 노력과 앞으로의 좋은 기억을 계속 만들어 가면 되는 일이다. 다시는 과거로 소환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