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내는 대신, 살아가기로 했다

어느 날 눈이 번쩍 떠지다

by 아리아

5년 전이었다.


모든 게 괜찮았다. 회사에서도 이런저런 변화들에도 할 일들을 해나가며 나의 영역을 잡아가고 있었고, 집에서도 예측하지 못하는 일들로 매일매일 전쟁 같은 육아를 해나가고 있었지만 그게 어디 나뿐만이겠냐 생각하며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나는 아이들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육아도 회사일도 다 잘 해내고 싶었다. 매일 빼곡히 적은 투두리스트를 지워가며 보람 있다 생각했다.


나름의 도전이라 생각하며 옮긴 부서에서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으며 업무를 확장해 갔고, 연차가 쌓일수록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어떻게든 맡은 일에서 성과를 내야겠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워킹맘으로 낮의 부재로 이어지는 아이들의 저녁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고,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린 둘째를 목에 매달고 첫째의 숙제와 준비물, 학원 일정들을 빠르게 해치웠다.


회사에서 성장해 가고 집에서도 경제적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는 자부심과 두 아이를 키워며 엄마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보람은 내 삶의 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매일 반복되는 같은 일상,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일들, 부단히 전력질주 하고 있는데도 같은 자리를 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며, '이게 맞는 것인지', '왜 제자리일까', '나는 뭐지' 끝없이 이어지는 나를 향한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일상에 소진되어가고 있었다. 성장이 멈춘, 아니 아등바등하며 열심히 뛰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뒤처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열심히 뛸수록 챗바퀴는 더 바쁘게 돌아갈 뿐, 늘 같은 자리 늘 같은 지점에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한데, 그럴수록 난 나 자신을 더 몰아세우고 있었다.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뭐든 완벽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밀려 삶의 여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이들과의 일과도 그랬다. 퇴근 후, 짧은 시간 많은 걸 소화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마주한 다정한 인사보다는 투두 리스트 노트에만 시선을 두고 쫓기듯 해야 할 일들을 했는지, 오늘 할 일들은 무엇인지 체크하는 데만 급급했다.


주체적인 내가 아닌 끌려다니는 나, 삶의 기쁨을 찾는 내가 아닌 뒤처지지 않으려 급급해하는 나.

내가 바라던 삶이 이런 것이었나.!


말 그대로 세상에 끌려다니는 삶이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밀려오는 일들을 쳐내는 데에도 바쁜데, 하나를 해치우면 두 개가 밀려오는 일상.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과를 살아내는 낯선 나만 남아 있었다. 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와서 아이들의 일과를 챙기고 나면 어느새 늦은 밤이 되고, 그제야 온전히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공허함이 밀려들며 스스로에게 보상을 해주듯 인터넷 서핑, vod 등을 기웃기웃하다가 잠들었다. 늦게 잠들었기에 늘 피곤한 아침이었다.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닌,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전날 늦게까지 웹서핑에 시간을 소모했다. 머리를 텅 비운 채 하루도 안가 잊어버릴 별 것 아닌 뉴스 기사들, 연예인 이야기들을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까지 보며 반쯤 눈이 감긴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아... 이게 뭐지...'라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다음 날 새벽, 눈이 번쩍 떠졌다. 어슴프레 잠이 깨어 몽롱하게 반쯤은 무의식에 있는 게 아닌, 형광등이 번쩍 켜지듯 한순간 정신이 생생해져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을 더 자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날은 조금은 다른 하루를 시작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새벽 5시, 무작정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딱히 집안에 내 공간이라 할 곳이 없었기에 화장대 의자에 앉았고,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았다. 매일 화장을 하고 양치도 하며 수시로 들여다보았던 얼굴인데 아무런 목적 없이 천천히 나의 민낯을 살펴보고는 알게 되었다. 그곳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낯선 내가 있었다. 이리저리 휘둘려며 살아내고 있는 생기 없는 나, 무언가에 지쳐있는 얼굴, 타인의 요구만 채워내고 있는 나,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역할'만 남아있는 나, 거울 속 나의 모습이 내가 알던 나의 모습이었나 싶게 낯설었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 건 내 삶을 내가 주도하며 살아왔던 기억들,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야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날들, 무언가를 꿈꾸며 행복해던 시간들, 그 찰나들이었다.


"이건 아니다. 네 모습은 이렇지 않았잖아. 나를 찾아야겠어. 그래, 뭐라도 해보자."


그날 새벽, 고요 속에서 거울 속 낯선 나를 마주하며 나지막이 막연한 다짐을 했다. 내 안에서 길었던 침묵을 깨고, 다시 나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보기로.. 나를 위한 시간을, 나를 위한 삶을, 더 이상 그 어떤 이유로도 미루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변화는 즉각적이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일을 해야 했고, 여전히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변해야겠다는 다짐 하나만으로도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고, 나를 위한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안에 새로움이 차오르는 게 느껴지며 조금씩 변화하는 나를 마주했다.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나는 그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woman-5835657_1280 (1).jpg Saydung89, pixabay








다음 이야기, "그래, 일단 뭐든!"

기대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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