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유식빵 Sep 18. 2023

흐르는 대로 살던 문과생

편집하지 못하는 편집자 1

용감한 문과생


 한 학기를 휴학했지만 7학기 만에 졸업하여 2016년 2월에 학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대학수업이 너무 재밌어서 공부와 동아리 활동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꿈, 목표, 스펙 그 어떤 것도 없이 사회인이 된 것이었다. 학점을 잘 받아 성적장학금을 놓친 적 없는 것, 과탑으로 졸업한 것, 이 두 가지가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취업이 힘들다는 문과, 그중에서도 어학을 전공해 놓고 무슨 배짱이었는지 영어점수, 컴퓨터 자격증, 한국사 자격증, 공무원, 공기업 시험 준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용돈이 끊긴 적이 없기 때문일까? 24살의 나는 조급함이 없었다. 

  

 커피를 좋아하니까 ‘카페에서 일해봐야지’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막학기가 끝나자마자 스타벅스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3교대 근무, 일주일 단위로 바뀌는 일정표에 내가 매주 무슨 요일에 쉴 수 있는지도 모르는 일상을 살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음료 레시피를 외우는 건 자신 있었지만, 음료를 만들고, 설거지할 때 손이 너무 느린 것도 문제였다. 점심시간에는 1시간에 음료를 거의 100잔씩 만들어야 했는데 다른 직원들에 비해 손이 느려 민폐가 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드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최저시급이 6,030원이던 시절, 시급 6,100원을 받던 정규직 자리를 4개월 만에 그만뒀다. 

 

 모은 돈도 없는 진정한 백수가 되었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고 준비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동네 도서관을 자주 방문하며 여유롭게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필사 모임에 들어가 책 한 권을 필사했는데, 내가 도전한 책은 은희경 작가의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라는 소설집이었다. 4명이 함께 시작했는데 나만 한 권 필사에 성공했고,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그때쯤 대학원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학부 교수님께 궁금한 것만 물어보려고 찾아갔는데, 교수님께서는 바로 외대에 친한 교수가 있다며 연락처를 알려주시고, 본인도 연락을 해두겠다고 하셨다. 의욕적으로 나를 도와주려 하시던 교수님의 모습에 ‘아. 네’만 하다가 2017년 3월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프랑스어를 전공해서 대학원도 불문과로 갔다. (독서, 책방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런 걸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대학원 공부를 하다 보니 학부 때 공부는 정말 귀여운 것이었고, ‘그래서 내가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구나’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같이 수업 듣는 학생도 몇 명 없었지만, 그중에서 내가 프랑스어를 제일 못했고, 그래서 수업 전 프랑스어로 된 텍스트를 읽어가야 할 때 남들보다 준비 시간도 훨씬 길었다. 

 

 이때 외대 앞에 있던 스타벅스에 정말 자주 갔다. 스타벅스가 다른 카페에 비해 일찍 문을 여니까 카페 오픈 시간에 가서 그날 수업을 예습했는데, 왠지 공부가 잘 되는 느낌이었고, 열심히 사는 나의 모습에 취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스타벅스는 손님으로 와야 좋구나’를 한 번 더 깨달았다. 그래도 공부가 힘들어서 지도교수님께 자퇴상담을 하기도 하고, 논문을 쓰면서 많이 울기도 했지만 5학기 만에 졸업했다. 이때가 2019년 8월이었다. 


첫 직장으로 출판사를 간 이유


 4학기 수업이 끝나고 5학기는 논문만 썼는데, 이때부터 졸업하면 정말 뭘로 먹고살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7살에 현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발견한 게 SBI였다. 불어불문학과에서 세부 전공으로 번역학을 공부했는데, 막연히 책과 연관된 것을 전공했으니 출판사에서 일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에 SBI에서 진행하는 편집자 수업을 신청했다. 두 달간 진행하는 수업으로 매주 다른 강사님들의 강의를 듣고, 큰 과제로 인문 장르의 원고를 조별로 기획해 보는 과정이었다. 직장도 다니지 않고, 매일 하는 일이 소논문과 이론서를 읽고, 정리하고, 쓰는 것이었기에 공부와 관련 없는 글을 읽는 일이 정말 즐거웠고, 같은 조로 활동하던 조원들과 마음도 잘 맞아서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과정이 나에게 딱 맞는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내가 뽑은 카피가 책에 사용되었고, 책 뒤에 수업을 듣던 학생들의 이름이 다 들어가니 뿌듯함이 배가 되었다. 여주시립 폰박물관에 가서 책을 쓰신 작가님의 강연도 듣고, 이 책의 카드뉴스도 만들고 하니, 편집자가 나의 길이라는 생각이 더 선명해졌다.

 

 2017년도부터 1년 반 정도 친구들과 책을 읽고 카드뉴스를 만들어 페이스북 페이지에 매주 올리던 경험도 한몫한 것 같다. 처음에 4명이 시작했는데, 각자 책을 읽고 카드뉴스를 하나씩 만들어와 서로 피드백하고 수정해서 페이지에 업로드하던 활동이었다. 포토샵도 쓸 줄 몰라서 PPT로 허접스럽게 만들었는데, 그래도 꾸준히 하니 팔로워가 13,000명까지 늘었다. 하지만 다들 점점 바빠지고,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옮겨가는 느낌이라 자연스럽게 활동이 끝나버렸다.

  

 마냥 논 것은 아니고 이것저것 해보긴 했는데, 뭐든지 즐기는 정도였지 생계를 위해 죽기 살기로 해본 것은 없었다. 그래서 2019년 하반기 처음으로 자소서를 써보며 추워지는 날씨와 함께 마음도 얼어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