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하지 못하는 편집자 3
책을 한 달에 4-5권씩 냈는데 자수, 뜨개질, 요리책이 많았고, 이 책 중 대부분은 일본 번역서였다. 하지만 잘 나가는 책이 거의 없었다. 재고를 털어 창고보관비라도 줄여보자는 의미로 해왔던 일 같다. 도서정가제 기간이 끝난 책들은 전부 3,600원이나 4,800원으로 가격을 내려 팔았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파주 물류창고에 가서 재정가 스티커를 붙이는 것도 나의 업무 중 하나였다. 처음엔 파주가 멀기도 멀고 스티커를 붙이는 정말 단순한 업무에 ‘이게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하면 할수록 스티커를 붙이는 속도도 빨라져 퇴근도 일러지고 사무실을 벗어난다는 해방감이 커져서 파주를 가는 금요일을 기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통 가면 나와 동기, 영업팀 남자직원 두 분 이렇게 넷이서 갔다. 나는 차가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남자직원 중 한 분이 발산역 앞에서 나와 동기를 태워서 물류창고로 함께 가주셨다. 그래서 항상 역 앞에서 커피를 사서 서 있던 기억이 난다. 도착하면 5,000권 정도의 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류창고 안에서는 지게차를 몬 직원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기에 우리는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팔레트 위에 책을 쌓아두고 작업을 했다. 나와 동기는 스티커를 붙였고, 남자직원들은 스티커가 붙은 책을 10권, 20권씩 쌓아 기계를 이용해 끈으로 다시 묶어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초반에는 조그만 스티커를 붙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잘못 붙여서 떼고 붙이는 동작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점점 일이 손에 익숙해지자 손가락 네 개에 스티커를 각각 붙이고 책을 빠르게 넘기며 책 가격이 적힌 자리에 착착 붙여갔다. 핸드폰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노동요로 틀어두고 흥얼거리며 기계적으로 스티커를 붙이다 보면 오전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식대가 따로 나오지 않아 각자 돈으로 4,500원짜리 구내식당 밥을 사 먹었다. 회사 근처에서 사 먹는 밥보다 맛있어 그것도 만족스러웠다. 밥을 먹고 나면 차를 몰고 5분~10분 정도 나가서 보이는 카페를 갔다. 거기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창밖 구경으로 하고 잠깐 이야기하고 쉬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런 허허벌판에 카페가 있으면 장사가 되나?’ 궁금했는데, 앉아있으면 중년의 손님 무리가 우르르 왔다가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회사 안 다니고 이런 곳에 카페를 차리고 햇볕을 쬐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 결국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사무실근무와 달리 한 시간을 칼같이 지키지 않아도 괜찮아서 1시 30분쯤 들어가서 마저 작업했다. 스티커를 붙인 책이 그렇지 않은 책보다 많아질수록 퇴근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힘을 내서 일했다. 창고는 너무 추웠고,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팠지만, 그 하루는 계약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육체적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늦을 땐 5시 반쯤 끝난 적도 있지만, 빠를 땐 4시면 퇴근할 수 있었다. 집에 갈 때도 출근길에 태워주셨던 직원분이 김포공항역에 내려주시면 거기서부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갔다. 경기 남부에서 경기 북부로의 출퇴근은 이동만으로도 피곤해서 그날은 집에 가서 그냥 뻗었다. 몸이 일단 불타서 재가 된 기분이었기에 불금 따위 없었다.
종종 재정가로 판매하는 책이 잘 팔려 그 책을 더 찍어내 스티커를 붙이는 일도 있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내가 바람 쐴 수 있는 날이 하루 늘어난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한 권을 만들 때 정성을 다해 예쁘고 알차게 만들면 좋겠다는 소망은 계속 품고 있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틀에 박힌 양식으로 못생기게 만들어 시장에서 남은 채소를 떨이하듯 파는 게 불편했다. 그래서 열 달 만에 나왔다. 그만두기 한 달 전에는 말을 해야 한다고 들어서 11월까지는 일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10월 30일에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사장이 4대 보험 내는 비용이 아까우니 다음날인 10월 31일까지만 일하라고 했다. 짠돌이인 것은 알았지만, 당황스러웠다. 10월 31일이 금요일이었고 파주를 가는 날이었다. 사무실 업무는 하루 만에 정리하고 급하게 인사를 하고 마지막 근무날은 파주를 갔다. 여기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시원했고,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싶어서 ‘이것도 추억이 되겠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3년이 지난 지금 스타벅스에서 햇볕을 쬐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파주에서 갔던 카페가 아련하게 떠오르는 걸 보니 추억이 맞나 보다. 항상 태워주셨던 직원분도 내가 그만두고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셨다던데, 가끔 궁금하긴 하다. 28살의 첫 직장생활은 예상보다 짧게 끝났고, 저자를 만나보지도, 원고를 읽어보지도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원하지 않은 업무를 하면서도 배운 것이 있었을 거라 믿는다. 어설펐지만 사회생활도 약간은 늘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