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이 저릿하게 마비되는 얼얼한 맛 , 마라
쿤밍을 떠나 따리고성으로 이동을 한다. 쿤밍에서는 아무생각이 없었는데 따리쯤 오니 중국의 맛 훠궈를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숙소에서 식당을 추천받는다. 몇가지를 물어보더니 훠궈집을 하나 추천해 주셨는데 찾느라 애를 먹었다. 사실 위치는 기가막히게 좋은 사거리 모퉁이였으나 한자에 익숙치 않아서 그 앞에 두고도 두리번거리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다.
여행을 다니다보니 중국의 훠궈처럼 팔팔 끓는 국물에 고기나 야채 등 각종 재료를 넣어 데치듯이 먹는 요리가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선로 같은 전골요리, 일본의 샤부샤부나 태국의 수끼 등이 비슷한 듯 다르며, 또 다른 듯 비슷한 방식의 요리들이다. 중국의 훠궈도 이런 요리들과 맥을 같이 한다. 육수를 팔팔 끓여 좋아하는 재료를 골라서 데쳐먹는다. 이에 곁들이는 소스는 먹는 사람 마음.
찾아간 훠궈집은 이미 홀을 가득 메운채 현지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간신히 테이블을 하나 차지한다. 일단 훠궈를 주문. 홍탕과 백탕이 있는 육수를 주문했다. 둘 다 맛보고 싶으니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퓨전 훠궈를 몇 번 먹어보긴 했지만 중국에서는 처음인지라 그 맛이 사뭇 기대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종이 위에 손글씨로 쓰여진 영어 메뉴판이 있었다. 야채들은 대부분 3-8원이었고 음료는 8-12원 정도, 고기나 생선류도 20-25원 정도로 저렴했다.
일단 마라홍탕과 백탕을 세팅해주셨다. 홍탕은 정말 붉다 못해 검붉은상황. 백탕은 생각보다 건더기가 많았다. 주로 파 대추, 버섯 등 몸에 좋은 약재가 들어간 느낌이다. 홍탕에는 그 유명한 향신료 '마라'로 추정되는 알갱이가 둥둥 떠다녔고 마른 고추가 숭숭 썰려 역시 육수위를 표류 중. 시간이 좀 지나자 육수가 끓기 시작한다. 이게 참 묘한게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우와 맛있겠다!' 이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검붉은 육수가 끓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서커스를 보듯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다. 훠궈가 음식이 아닌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랄까. 테이블 옆에는 도서관에 있는 북트럭 같은 선반이 있었는데 주문한 야채나 생선, 고기류 등을 올려 두는 곳이었다. 이것 저것 시키다보니 둘이 먹는데도 순식간에 엉청난 양이 되었다. 사람이 좀 더 많으면 더 다양하게 시켜먹을 수 있었을텐데 아쉬웠다.
입안이 저릿하게 마비되는 얼얼한 맛, 지옥의 맛을 보다
시뻘건 한껏 끓어오른 홍탕에 맘에 드는 재료를 넣어서 재빨리 건졌다. 그리고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아 그러나....정말 생전 처음 만나는 강렬한 맛이었다.뭐라고 표현하기조차 힘든....일단 비누맛 같은 것이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이 느낌이 나자마자 매운 맛이 입안을 강타한다. 하지만 잘 느껴보면 매운 맛만은 아니었다. 뭔가 혀를 포함한 입안 전체를 감전시키듯 저릿하게 마비시키는 맛. 지독하게 진하고 입술까지 찐득이며 음식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자극을 다 가진 맛. 심하게 얼얼해서 이 맛을 매운 맛으로 착각하게 걸수도...하지만 실제로 맵긴 매웠다. 그래서 입 안에 고기를 넣든, 채소를 넣든 무슨 맛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비누맛처럼 느껴졌던 맛은 박하맛과 비슷했다. 단 한가지만의 향신료만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맛이다. 주인공은 있겠지만 분명 엄청난 조연들이 이 맛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열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얼얼하다 못해 마비가 시작된 입을 가라앉히기 위해 백탕으로 가본다. 백탕은 다행스럽게도 그냥 평범한 닭육수의 맛이었다. 익숙한 맛. 하지만 여기에도 묘하게 아주 살짝 생소한 맛이 올라온다.
훠궈는 중독성이 강했다. 얼얼한 매운 맛이 살짝 사라지게 되면 또 다시 입안에 다른 재료를 우겨 넣게 된다. 그리고 다시 저릿하게 마비가 시작되는 지옥의 맛을 즐기게 된다. 이런 루틴을 반복하다보니 음식을 먹는건지, 얼얼한 마비를 즐기는건지 분간이 안되는 상황이 된다. 음식을 음미하며 상대방과 담소를 즐기는 것은 이미 포기했다. 나의 입을 강하게 강타하고 있는 마라탕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바빴다.
저릴 마, 매울 랄. 향신료 마라
정말 먹기 시작하자마자 정신을 쏙 빼놓은 훠궈. 이렇게 만들어 놓은 주범은 바로 '마라' 향신료. 마라 향신료에는 우리가 잘아는 후추,팔각, 육두구, 정향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젠피라고 불리우는 화자오가 들어간다고 한다. 화자오는 촉초라는 나무의 열매로 우리가 추어탕에 넣어먹는 산초와는 친척뻘이다. '마라'라는 이름 자체가 '저릴 마', '매울 랄'이라고 한다. 고추의 캡사이신과는 또다른 입안이 저려오는 매운 맛을 선사하겠다는 의미인가 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매운 탕들이 시원하게 매운 맛을 내준다면, 훠궈의 마라탕은 저릿하게 마비되는듯한 찐득하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매운 맛을 선사했다.
'마라'에 빠져버린 대한민국~~
마라탕, 마라상궈, 마라홍탕, 훠궈 등등 마라를 이용한 요리들이 우리들 속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그야말로 마라 열풍이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운 맛을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래 즐겼던 매운 맛은 마라의 매운 맛과는 다른 차원의 매운 맛이다. 나는 마늘을 듬뿍 찧어 넣고 매운 고춧가루를 써서 만든 낙지 볶음의 혀가 아릴 정도의 알싸한 매운 맛을 사랑한다. 분명 다른 매운 맛이지만 무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스트레스를 잠시 잊고 매운 맛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맥을 같이 한다. 매운 맛에 정신이 혼쭐날 정도가 되어 땀을 뻘뻘, 입 안에 손으로 휘휘 바람을 불어넣어 식히고 나면, 나를 괴롭혔던 모든 일들이 어디론가 잠시 사라진 느낌이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팍팍하고 힘든 것은 아닌지.
영화 범죄도시에는 장첸으로 분한 윤계상이 마라롱샤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양 손에는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오른손으로 한 웅큼, 그리고 무식하게 왕새우를 집어든다. 시뻘건 마라 옷을 입은 왕새우의 목을 이내 거칠게 따버리고 왼손으로는 새우의 몸통을 재빨리 입으로 밀어넣는다. 장첸의 거칠고 무자비함이 마라롱샤와 더불어 잘 표현된 명장면. 장첸은 마라의 매운맛에 굴복되지 않았다. 인상 한번 쓰지 않고 마라를 음미하며 자신의 몸값을 올렸다.
하지만 난 마라에게 KO패를 당했다. 따리에서 훠궈를 먹은 날, '이번 여행에서 훠궈는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쓰촨의 마라가 듬뿍 들어간 검붉은 마라 홍탕에 영혼까지 탈탈 털려서 말이다. 그런데 참, '시간'이라는 매직은 그저 놀라울 뿐. 지옥의 맛에 혼비백산하여 집 나갔던 영혼이 이제 다시 슬슬 돌아온 듯하다. 다시 중국여행을 가게 된다면 정신줄을 단단히 붙들어 놓고 다시 한번 예의 그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지옥의 매운 맛'에 도전해볼까 한다. 마라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