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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비장한 아름다움에 반하다

칠레-토레스 델 파이네

by 별나라



남극을 마주하는 곳, 칠레가 자랑하는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는 서글프다. 마추픽추와 우유니 소금사막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빨라진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쏟아져 내리는 이구아수 폭포는 사람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탄성을 뽑아낸다. 이들 명품 여행지가 남미를 꿈꾸는 여행자들에게 제일 먼저 선택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는 참 낯설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찾아보니 이곳은 1200만 년 전에 화강암으로 생성된 산맥이 형성되어 있고 12개의 빙하와 빙하가 녹은 물이 호수를 이루는 기가 막힌 절경이란다. 더군다나 유네스코 지정 생물다양성 보전 지역이라니 인증도 받은 셈이다. 하지만 글로 된 설명만으로는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마추픽추가 안데스의 머리라면 토레스 델 파이네는 이 긴 산맥을 떠받치는 발에 해당하는 곳이다. 멀어도 너무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레스 델 파이네를 선택한 순간 어떠한 예고된 감동도 뜻밖의 감동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토레스 델 파이네가 바로 그런 곳이다.



P1160633[1].jpg @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토레스 델 파이네 모습


P1160718[1].jpg @ 헐...이게 웬 비현실적인 풍경인가요.


P1160765[1].jpg @ 빙하가 녹아서 생긴 폭포소리에 서로 대화가 안될 정도에요. 바람세기 장난아님. 날아감 주의!!!



가장 멀리 가는 여행자가 가장 비범한 풍경을 만난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남미’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네 시간 반을 날아간다. 그리고 버스로 갈아타고 6시간을 달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야 간신히 토레스 델 파이네를 가기 위한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머리 위로 바람이 날아다니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격자모양의 도로망에 올망졸망 갇혀있는 곳이다. 트래킹을 위한 장비 대여점과 작은 여행사들,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들이 이 작은 마을을 이루는 전부라 할 수 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이다. 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처럼 기대와 떨림,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누를 수 없는 잔잔한 흥분이 넘실거린다. 세상의 끝, 가장 멀고 외로운 곳에 도착했다는 성취감에 취해 있으나 결코 자만하거나 흥청거리지 않는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토레스 델 파이네의 절대비경을 W자 모양으로 구비구비 파고들며 속살을 느껴볼 수 있는 트레킹이다. 4박 5일 코스가 정석이긴 하지만 바쁜 여행자를 위한 일일투어라는 비장의 무기도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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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60831[1].jpg @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위로가 되는 풍경


아침 7시 30분,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출발하는 밴을 타고 한 시간 남짓을 달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사르미엔토 호수(The Sarmiento Lake)에 도착하게 된다. 토레스의 세 봉우리가 위엄 있게 보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안데스 콘도르가 검은 날개를 힘껏 펼치고 날아다닌다. 황량한 듯 드넓은 초원에는 남미의 낙타 과나코가 풀을 뜯어 먹고, 남미의 타조 난두는 뒤뚱거리며 어디론가 도망간다. 마치 알프스와 세렝게티가 절묘하게 만났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직 지나친 감탄은 금물이다. 어느 순간 암석 덩어리 산맥들이 파노라마처럼 주욱 펼쳐지게 된다. 진초록 나무들이 빽빽하게 덮여있는 그런 산이 아니다. 하얀 만년설이 전부를 휘감고 있는 그런 산이 아니다. 인간을 위해 산악열차나 케이블카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그런 산이 아니다. 그저 땅 속에서 불끈 솟아올랐을 뜨거운 덩어리들이 신의 뜻대로 기기묘묘하게 조각되어 크리스탈처럼 빛나다가 새까맣게 마무리된다. 오랜 세월 빙하에 의해 깎이고 쪼개지고 다듬어진다. 이것이 바로 ‘파이네의 뿔[Cuernos del Paine]’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봉우리도 있고 그마저도 허용치 않는 까칠한 봉우리들도 있다. 빙하가 녹은 물은 어느 곳에서는 에메랄드 빛, 또 어느 곳에서는 사파이어 빛을 만들어 내며 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극한의 카리스마와 사람의 넋을 빼놓는 비현실적인 풍경이 묘하게 공존한다.



P1160835[1].jpg @ 페오에 호수와 토레스 델 파이네의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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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할 수 있는 가장 위로가 되는 풍경



토레스 델 파이네의 봉우리들을 가장 편안하고 현실감 있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페오에[Pehoe] 호수에서다. 점심 무렵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일단 모든 먼지가 걷히고 시력이 한층 더 좋아진 느낌이 든다. 드넓은 페오에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싼 봉우리들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초록빛 융단 같은 잔디에 삼삼오오 앉아서 각자 가지고 온 도시락을 풀어헤친다. 여행자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태고의 자연 속에 간간이 울려 퍼진다. 참 생경한 느낌이다. 바로 눈 앞에 있으면서도 결코 소유하거나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극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인내의 억겁의 시간들은 여행자들이 가진 상처와 고민들을 순식간에 무색하게 만들고 잔잔히 오래도록 위로한다. 그래서 이 풍경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브라질 쿠리찌바에서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여행 온 시바는 이런 말을 내뱉는다. “오늘 아침까지 내가 고민했던 게 뭐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분명히 심각한 거였는데..” 머리가 나쁜 거 아니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시바의 말에 모두들 공감한다.


P1160894[1].jpg @ 그레이 빙하 가는 길-흔들다리가 무섭워요..바람이 장난아니거든요!


P1160905[1].jpg @ 거대한 자연에 비해 인간의 너무나 작은 존재
P1160937[1].jpg @ 날아가지 않으려면 온 몸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어야 해요^^



페오에 호수를 지나 그레이 빙하로 향하면 계절은 여름에서 초겨울로 급변한다. 회색 빛이 감도는 물 위에 놓은 구름다리는 한번에 6명 이상은 동시에 올라설 수 없다. 마치 모험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 설렌다.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가로 지른다. 빙하를 스친 바람은 차갑고 날카롭다. 하늘에서 내리 꽂는 햇살은 강렬하고 눈부시다. 방향은 정하지 말고 걸어야 한다. 내가 갈 곳은 내가 아닌 바람이 결정한다.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나니 어느 순간 뒤로는 봉우리가 즐비하고, 회색 빛 호수에 빙하가 두둥실 떠있는 모습과 마주한다.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세상은 심장이 에이는 듯 아름다운 것이다.


P1160966[1].jpg @ 마지막 남은 한 장면까지 소중하게 찰칵찰칵!


토레스 델 파이네 일일투어가 끝나가는 순간 ‘아쉬움’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밀려온다. 단 하루만 시간을 할애했다는 사실은 안 운전사 겸 가이드는 “넌 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야.” 라는 말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예측불허의 날씨라서 단 하루만의 시간을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못보고 돌아갈 확률이 더 크다고 한다. 아마도 가장 멀리 떠나온 여행자를 위한 신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칠레산 와인을 한 잔하며 밤인 듯, 밤이 아닌 남반구의 백야를 오롯이 즐기며 너무 빨리 끝나버린 하루를 추억한다. 엄마 품처럼 따뜻하고 잘 빚어진 술처럼 향기로운 푸에르토 나탈레스, 비장한 아름다움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히는 토레스 델 파이네는 한번 만나면 결코 잊기 힘든 곳임에 틀림없다.




**토레스 델 파이네 여행 꿀팁!


1. 푸에르토나탈레스 내가 묵은 숙소: TIN HOUSE PATAGONIA (http://tinhousepatagonia.com) 도미토리룸과 더블룸이 있어요.

2. 일일투어 교통편만 제공: 게스트하우스에서 예약 (07:30-18:30, 도시락 지참,사계절 복장)

3. 토레스 델 파이네 입장료 21,000CLP ( 약 USD 30.60) 2018-2019 시즌요금

4. Erratic Hostel: 트레킹 무료강의 및 동행자 찾기 가능(추천)

5. 주변여행지: 푼타아레나스 버스 3시간, 엘칼라파테 모레노 빙하 버스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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