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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Nov 15. 2020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갑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 내렸다. 매일 밤 텔레비전을 보며 맥주를 홀짝이던 거실도 어둠을 입었다. 꼬박 두 달 동안 지내던 동생 네 아파트 문간방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첫 책 <결혼에도 휴가가 필요해서>의 출간에 맞춰 한국에 온 게 벌써 두 달 전이다. 2주 간의 자가격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북토크를 하러 다녔다. 서울에서, 원주에서, 남양주에서, 대구에서, 제주에서 독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갈피갈피 접은 책을, 포스트잇을 빽빽하게 붙여 들고 온 책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내 책이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나 그들의 것이 된 책을 보며 마음이 기뻐 둥실 날아오르다가 또 겁을 먹고 덜컥 떨어지기도 했다. 감사했고, 뿌듯했고, 자랑스럽기도 했고 또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렇게 독자들을 만나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실컷 했다. 말하기가 어려워 책을 썼는데 결국 썼던 말을 고스란히 다시 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즐겼다. 처음엔 떨었지만 갈수록 신이 나서 신나게 떠들었다.  

그러다 보니 두 달이 훌쩍 지났고, 나는 내일 공항에서 조금은 속이 상할 것 같다.

곧 다시 올 거니까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말이다. 한국에 와서 2주, 그리고 다시 말레이시아에 돌아가서 2주의 자가격리는, 그것도 호텔에서 만만치 않은 금액을 지불하며 지내야 하는 자가격리는, (다행히 한국에서는 동생 집에 머물 수 있었다) 정말이지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다시 하게 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지금 나는, 한국에서의 이 마지막 밤을 몹시 아껴 쓰고 싶다.
언제 다시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밤은 어떻게 아껴 쓸 수 있는 것일까.
푹 자는 것일까. 아니면 밤을 꼴딱 새우며 두 달 간의 출간 기념 여행을 돌이켜 보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한국 방송이 철철 넘치는 텔레비전을 원 없이 보는 것일까. 모르겠다.


북토크를 하며 말도 많이 했지만 듣기도 너무 많이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는 넘치는 말들을 말이다.  쉬지 않고 떠드는 홈쇼핑, 드라마, 예능, 광고, 심지어 십 년 전 드라마까지 텔레비전은 지치지도 않고 24시간 쏟아내고 있었다. 텔레비전 없는 집에서 온 나는 밤마다 홀린 듯 앉아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만 봐야지 해도 고놈의 텔레비전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들을 섭렵했고, 사지도 않을 홈쇼핑 채널도, 몇십 년 전 대장금과 장희빈도 아무 생각 없이 앉아 보고 있었다. 매일 바빴는데, 심심할 새는 또 매일 있었다. 이상하게.
  
안 보면 되지 않아? 물론 그렇다. 하지만 거실의 주인인 양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텔레비전을 무시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건 왠지 집주인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라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간혹 텔레비전을 켜곤 했다. 그리고 한 번 켜면, 리모컨을 들고 하염없이 채널을 바꾸는 건 쉽지만, 또 딱! 하고 꺼버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듣기만 많이 들었으랴. 먹기는 또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지만, 먹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것들도 너무 많이 먹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배가 부르다. 맥주캔이 비어도 집어먹던 과자는 딱 멈추지 못한다. 야금야금 주워 먹다 결국 고개를 뒤고 젖히고 입을 크게 벌려 탈탈 털어 넣는다. 그리고 자괴감. 아, 나는 왜 이럴까.

그 많은 넘침.
내가 한 말도, 들은 말도, 그 많던 음식도, 전부, 여행이라 괜찮다고 위안한다. 두 달 남짓 한국에서의 생활이 내게는 여행이니까. 갑자기 날개를 달고 구름 위로 붕 떠올라 있는 느낌이니까. 첫 책의 출간과 북토크까지 함께 했던 여행이니, 그러고도 남았지. 그냥 여행만 가도 기분이 좋은데, 그 기분이 어땠겠어. 그러다 보니 먹기도 좀 먹었지.

심지어 추위도 먹었다. 한국에서의 첫 외출은 반팔이었는데, 영하의 날씨에서 덜덜 떨던 날도 있었다. 마침 그날은 운행 간격이 아주 먼 전철을, 지상에서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다. 전철을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었다. 아, 얼마 만에 느꼈던 추위였을까. 어우, 그런데 한 번으로 족하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가서 다행이다. 물론 겨울은 좋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겨울 대비까지는 하지 않았다. 겨울은 나중에 마음 단단히 먹고 다시 와서 맞을 생각이다.

아, 걷기도 많이 걸었다. 서울에 오면 언제나 뚜벅이 신세니까. 우붓에서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도, 조호바루에서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없이 오직 전철을 타고 걸어 다녔다. 새빨간 단풍에 고개를 쳐들고 감탄하며 걸었고, 북한산을 바라보며 걸었다. 삼청동을, 계동을, 부암동을, 북악산 언저리를, 노란 은행잎 깔린 거리를, 자박자박 밟으며 걷고 또 걸었다. 제주를 달렸다.


그리고 마지막 밤,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실컷 말하고 듣느라 고생했다고. 추위는 반가웠고, 수많았던 그 걸음은 좋았다고.
그렇게 여행 온 듯 떠돌다 집으로 돌아와 종일 썰렁해진 집에서 부르르 떨며 보일러를 24도로, 약간 추우면 25도로 설정하던 밤들이, 그리고 불을 딸깍 끄고 낯선 침대에 눕던 밤들이 분명 그리워질 거라고. 다시 2주간의 자가격리를 해야 할 쿠알라룸푸르의 어느 호텔 낯선 침대에 누워 에어컨 리모컨을 찾을 내일부터 정확하게 말이다.

다시 2주 간의 자가격리.
말할 일은 거의 없을 테고, 텔레비전도 켜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도 줄일 생각이다. 한국에 와서 작아져 버린 바지를 다시 넉넉하게 만들어야지. 추위에 잔뜩 긴장했던 몸도 다시 열대의 날씨에 맞춰 조금은 늘어지겠지.  걷느라 땅땅해진 종아리도 다시 말랑말랑해질 테고. 그렇게 다시, 2주 동안 균형을 잡겠지. 2주 간의 잠시 멈춤, 그 쉼의 시간을 고맙게 알차게 잘 써야지.  

그런 다짐을 하며,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애써 꾸역꾸역 늘리고 있다.

안녕, 마지막 밤.

반갑고 아쉽네. 너도 내 마음 알겠지. 내일 아침까지 아무 일 없도록,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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