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롤러코스터
하늘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다가 아찔한 속도로 땅을 향해 달려드는 롤러코스터. 거기 앉아서 양팔을 벌리고 환호하는 사람? 나는 아니다. 그래서 놀이공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봤자 공중에 둥둥 떠서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나 탄다. 조금 에너지가 넘치면 범퍼카에 앉아 쿵 부딪히는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놀이공원에 가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십여 년 전, 아이가 일곱 살 즈음이었다. 물론 무서운 건 전부 남편을 태워 보냈고, 나는 환호하는 관중이 되어 부지런히 사진을 찍거나, 아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전목마만 탔다.
지금 SNS를 달구고 있는 마이어브릭스 성격유형 검사, 쉬운 말로 MBTI를 처음 접한 건 놀이공원에서 사진을 찍던 때에서 또 7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단 말이다. 지금이야 관련 짤이 넘쳐나지만 그때만 해도 MBTI는 몹시 생소한 개념이었고, 내가 그 생소한 성격 유형 검사와 풀이를 목숨줄인 것처럼 붙들었던 이유는, 도대체 내가 사랑해서 결혼했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고 서로의 뚜껑을 열어 파악한 그의 성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인간 자체가 함량 미달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나와 백이면 백,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반대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화성을 이해해 보고자, 동시에 나라는 금성을 납득시켜 보고자 현명한 결혼 생활이나 성격 차이 등에 대한 책들을 섭렵하다가 알게 된 것이었다.
거실에 티브이를 틀어놓고 누워 있는 것은 일요일에 나가지 못하는 외향적인 남자가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식이었다. 하루 종일 좁은 집에서 아기 울음소리와 예능 프로그램의 수다를 듣는 것은 내향적인 여자의 배터리가 급속 방전되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남편은 출근하고 텔레비전은 입을 다물어도 아기와 함께 있는 한 여자의 배터리는 늘 빨간 불이었다. (외향 E vs 내향 I)
아이를 낳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가 먼저 나섰고, 아이를 조금 키운 다음 내가 나섰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나는 일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와 보람, 꿈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현실이 더 중요했다. 나는 아무리 급해도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었지만 그는 빨리 이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를 꾸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현실을 먼저 안정시켜야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나는 대책 없는 공상가였고 내가 보기에 그는 꿈이라고는 없는 현실주의자였다. 물론 그 현실주의자 덕분에 지금 먹고살고 있지만. (감각 S vs 직관 N)
일요일 오후 4시에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러면 가야 하는 것이 나다. 그런데 급한 일이 생기면 장보는 건 다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미루는 것이 그다. 일요일 오후 4시 장보기를 위해 아이의 수유와 낮잠 시간을 조절하고 기저귀 가방을 싸 놓으며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갑작스러운 취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알고 보면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선약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것이었다. (판단 J vs 인식 P)
하루 종일 혼자 아기 보기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며 내가 얻고 싶은 것은 공감과 위로지만, 그는 감정을 알아주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문제는 대부분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 다 스트레스만 받고 둘 다 피폐해진다. (사고 T vs 감정 F)
물론 지금은 서로 한 발짝 다가가기도 했고 많이 섞이기도 했고 심지어 정반대로 바뀐 것도 있다. 결혼의 힘은 그렇게 대단하다. 성격까지 바꿔버릴 정도로 말이다. 모난 성질이 둥글어졌다.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배웠다, 등의 멋진 말들 뒤에는 결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가슴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말들과 일상을 삼켜 버리는 침묵의 늪 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MBTI도 말해주지 않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각자의 뿌리 깊은 기질이 있었으니, 바로 감정의 폭이었다. 나는 약간 차분한, 다른 말로 우울한 기질이 잔잔하고 꾸준하게 유지된다면, 그는 감정의 폭이 큰 편이었다. 그는 좋은 것은 온몸으로 춤을 추며 요란하게 좋아했고 싫은 것은 온갖 나쁜 말을 한 번씩 다 내뱉으며 온 몸으로 싫어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게 좋아도 ‘좋다’, 끔찍하게 싫으면 ‘싫다’고 하는 것이 최대한의 감정 표현이었다.
좋은 쪽이든 싫은 쪽이든 그가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면, 에너지 레벨이 낮은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 분위기에 흡수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급속 방전된다. 물론 혼자서는 사람도 잘 만나지 않는 내가 그를 따라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가끔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것도 좋고 또 가끔은 필요하다. 그는 혼자서 동굴 밖 탐험을 하지 않는 내게 세상을 구경시켜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여행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의 흥겨운 바이브 덕분에 나도 덩달아 즐거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고민이 생기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땅굴을 파기 시작하는데, 평소에 훨씬 우울한 내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간다. 그리고 며칠씩 그 안에 처박혀 있다. 좋아하는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심지어 책을 펼치기도 한다. 그건 그가 아주 우울하다는 뜻이다. 그럴 때는 내가 옆에서 아무리 꺼내 주려고 해도 효과가 없다. 하긴 내향인인 나에게는 애초에 그를 꺼낼 수 있는 능력도 없지만 말이다.
아침에는 네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무엇이냐는 황당한 수수께끼처럼, 그는 아침에 흥겹게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고 나갔다가, 밤에는 삶 자체를 후회하며 땅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그 변화를 알아챌 능력만 있지 거기서 그를 꺼낼 능력이 없는 나는 그럴 때마다 롤러코스터의 손잡이를 꽉 붙잡는 사람처럼 긴장한다. 이번 스윙은 얼마나 클 것인가, 각도는 얼마나 아찔할 것인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다가 얼마나 빨리 떨어질 것인가.
하지만 결혼이 무엇인가. 이제 내공이 생기긴 했다. 사실 내공이라고 해봤자 땅속으로 내리 꽂힌 롤러코스터가 다시 느린 속도로 돌돌돌 올라오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럴 때는 그가 좋아하는 반찬을 해 놓으면 좋다. 예를 들면 두부조림 같은 것. 굳이 말을 시켜 기분을 북돋워주려 하지 않는다. 상황만 나빠진다. 어차피 내 역량 밖의 일이다. 그가 혼자 올라와야 한다. 겨우 올라온 롤러코스터가 다시 하늘을 향해 올라가면 단전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모아 최대한 반응을 해준다. 그래 봤자 그에게는 싱거울 뿐이겠지만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반응이며 그도 이제 그 정도는 알 것이다. 모든 사람이 열화와 같은 호응을 해주는 것은 아니며 내가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 당신, 그 흥겨운 에너지는 밖에서 마음껏 발산하고 오는 게 어떨까? 약간 방전된 상태로 집에 오면 나랑 딱 비슷할 것 같으니 말이야.
자, 놀이공원은 진작 끊었지만 아직도 가끔 타는 롤러코스터가 있으니 그것의 이름은 바로 나의 ‘반려코스터’ 오늘도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이제 와서 내릴 수도 없으니 적어도 멀미만은 피하고 싶지만 이놈의 멀미는 결혼 16주년이 지나도 영 가시지 않는다. 90도로 엉금엉금 올라갈 때나, 미친 듯이 땅으로 내려 꽂힐 때나, 그저 눈을 꼭 감고 주문을 외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This Shall Pass. 그리고 다시 느리고 잔잔한 구간이 돌아오면 평화로운 마음으로 고요하게 숨을 고른다. Inhale, Exhale, Inhale, Exhale.
이 글은 여성 에세이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창간한 에세이 전문 월간 웹진
'2W 매거진' 22호 <반려에 대하여>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8618618
본문 사진 Photo by Meg Boulden on Unsplash
메인 사진 Photo by Elahe Motamedi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