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편이 갑자기 호캉스를 다녀오래. 혼자 호텔에 가서 조용히 푹 쉬다 오라고. 그래? 평소라면 솔깃해서 당장 짐을 쌌을 텐데 요즘 이상하게 외로운 게 싫더라고. 그렇다고 같이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같이 있다가 혼자 있고 싶을 때 나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면 될 것 같았어.
그래서 호캉스 대신 쇼핑을 좀 하기로 했지. 남편은 아마 내가 우울해 보여서 호캉스를 권했을 거야. 며칠 동안 내 영혼 없는 표정을 지켜보다가 뭐라도 해보라고 옆구리를 쿡쿡 찔러주니, 그럼 호텔은 됐고 쇼핑 좀 하고 올게! 호캉스 안 갔으니 평소보다 좀 많이! 이런 마음이 들었던 거지.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조호바루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쇼핑몰로 갔지. 그런 의리의리 한 쇼핑몰의 장점은, 가격만 봐도 동공에 지진이 이는 고가의 명품 매장이 대부분이라 결국 살 것도 별로 없다는 거야. 내가 살만한 브랜드들이 많아야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고민하는데 그런 재미가 없는 거지.
어쨌든 그날 사고 싶었던 건 화장품이었어. 지금 갖고 있는 팩트가 왠지 피부톤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야. 살 때는 그럭저럭 쓸만했는데, 머리 색이 바뀌어서인지, 스타일이 바뀌어서인지, 아니면 피부 탄력이 떨어졌는지 팩트를 톡톡 두드릴 때마다 이게 진정 내 얼굴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막 들었거든. 그래서 그나마 가볼 만한 세포라 매장에 들어갔어. 세포라는 말하자면 화장품 편집샵 같은 곳이랄까. 여러 브랜드를 모아 놓은 매장이지. 물론 다 알겠지만 예전의 나처럼 모르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어쨌든 규모도 어찌나 큰지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가 즐비하더라고. 와 와 신기하다 처음 본다 신나게 구경을 했지. 사고 싶은 게 있어서 들어왔는데 너무 많아서 뭘 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런데 매장 중앙에 메이크업을 해주는 코너가 있었어. 아, 혹시 나도 한 번? 생각하면서 그 주변을 서성이는데 직원들이 나에게는 권하지 않는 거야. 쳇 너무 후줄근하게 입고 갔나? 전문가의 손길로도 변화가 불가능해 보일 만큼? 아니 저렇게 놀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는 안 권하는데! 그렇게 속으로 부글부글하며 한참을 배회하다가 결국 포기했어. 그렇다고 내가 나도 좀 해달라고 먼저 나서진 못하는 성격이거든.
암튼, 메이크업은 포기하고 뭘 사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그중에 그나마 아는 브랜드 앞에 발길이 멈추더라고. 예를 들면 크리니크 같은. 크리니크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에 들어갔다고 존슨즈 베이비 로션을 졸업하고 엄마가 사준 라네즈인지 마몽드인지를 쓰고 있었는데 그때 친구 하나가 크리니크를 바르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뇌리에 박혔던 브랜드였어.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비싸서 못 사다가 마침내 그거 정도는 사도 될 만큼 여유로워졌고 분풀이하듯 마구 사서 한참 쓰던 브랜드였지. 결국 나랑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렇게 선택권이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마치 신입생 환영회에서 고등학교 동창 찾듯 한 번이라도 써봤던 브랜드로 쭈뼛쭈뼛 되돌아가게 되는 건가 봐.
암튼, 말레이시아에는 다양한 인종이 살고 피부톤도 거의 화이트에서 거의 블랙까지 다 다르니까 색도 얼마나 다양한지 몰라. 한국에서는 21호 23호, 많아야 하나 정도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코로나 때문인지 샘플도 없고 색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만져만 보다가 터덜터덜 발길을 돌렸지. 두세 가지 중에서 고르는 건 쉽지만 너무 많은 것들 중에서 고르려니 뇌에 부하가 온 거야. 책이라면 좋은 책, 별로인 책, 싫은 책, 휴가 갈 때 좋은 책, 자기 전에 읽기 좋은 책, 친구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 절대 빌려주면 안 되는 책 등 나만의 기준이 확실한데 화장품은 완전 내가 모르는 딴 세상이었어. 다 그게 그거 같고. 뭐가 다른 지도 모르겠고. 뭐가 다른지는커녕 애초에 이게 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그리고 나는 벌써 지쳐버렸지. 그래, 쇼핑은 이렇게 힘든 거였어. 그렇게 터덜터덜 걷다가 바로 옆 옆에 있는 다른 화장품 매장에 들어갔어. 그 매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비싸서 쳐다보지도 않아!라고 생각했던 브랜드였는데, 알바를 하던 딸이 어느 날 거기 립스틱을 하나 사 온 거야.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새겨서. 아니! 엄마도 못 쓰는 걸 네가! 네가 감히 벌써! 이런 마음이 화라락 들었던 거지. 아들 맘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물론 안 그런 딸들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 딸이 돈 개념을 알고 나서부터 쇼핑도 마음대로 못하는 편이거든. 엄마가 사는 것마다 가격표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눈을 막 부라리고 그래서 말이야. 그랬는데 저는 엄마도 못 쓰는 립스틱을 쓴단 말이지! 물론 스스로 일해서 번 돈으로 산 것이나 뭐라 할 순 없지만. 암튼 그래서 딸도 쓰는데 나라고 못 쓸 것도 없지! 이런 마음으로 들어갔단 말이야.
아 몰라, 여기서 그냥 살래 딱 이런 기분으로. 왜 그럴 때 있잖아. 일 때문에든 사람 때문에든 지쳤을 때, 지금 나는 돈을 쓸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친절한 직원 하나만 나한테 말 걸어봐. 그럼 내가 다 사줄게. 뭐 이런 기분 말이야. 암튼 그런 마음으로 들어갔더니, 세포라와 다르게 직원 하나가 바로 옆에 착 붙여서 뭐가 필요하냐고 묻잖아. 심드렁하게 쿠션이 하나 필요하다고 대답했지. (말하면서도 그런데 쿠션이 뭐지? 생각한 건 비밀) 그러자 제깍 나를 쿠션 앞으로 데려가 막 설명을 해 줘. 게다가 내 얼굴을 딱 보고 이거면 된다고 정해주니 얼마나 편해. 그래서 그걸 산다고 했어. 그런데 내가 사는 게 정확히 뭔지, 언제 어느 순서에 끼워 발라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 거야. 예전에는 초록색 메이크업 베이스 (왜 초록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궁금해) 그리고 살색 파운데이션, 다음에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뭔가를 톡톡 발랐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팩트가 등장하고 또 쿠션이 등장하고 이래서 뭐가 뭔지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물어봤지. 사실 대충 선크림 바르고 그 위에 그거 바르고 끝일 심산인데, 뭐랄까 괜히 알고 싶은 지적 욕구였달까. 그래서 이건 도대체 뭐고 이거 전과 후에는 뭘 바르면 되냐고 물었어. 그런 걸 물어볼 때마다, 정말 이런 걸 묻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긴 해.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걸 나만 모르는 것 같을 때의 그 기분. 보통은 그게 뭐 어때? 관심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한 번씩 우울해질 때는 그런 것까지 내 우울에 숟가락을 얹거든. 넌 이런 것도 모르니 쯧쯧 하면서 말이야.
암튼 그 질문을 하면서 갑자기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었어. 화장의 기본도 모르던 시절, 그때 막 생기던 미샤나 페이스샵에 가서 와 화장품이 이렇게 싸다니! 종류가 이렇게 많다니! 하면서 직원 언니들한테 이건 뭐고 언제 어떻게 바르면 되냐고 물어봤었거든. 그런데 20년을 훌쩍 더 살고 나서도 나는 또 여기 중국계 말레이시안 동생, 아니 조카 뻘 되는 직원에게 같은 걸 물어보고 있네. 그 자괴감이란. 사람이 말이야, 세월이 지나면 발전을 해야 하는데 왜 똑같은 걸 물어보고 있냐고. 물론 관심 없는 분야라면 모를 수 있지. 암, 모를 수 있어. 그런데 관심 없는 분야가 천문학 경제학 뭐 이런 것도 아니고 그저 화장품 바르는 순서라면, 그래서 그런 걸 모를 때면 내가 참 대책 없고 바보 같은 인간이구나 싶거든.
암튼, 그래서 매장 언니가 그전에 프라이머를 바르면 좋대. 프, 뭐요?라고 되물었지. 그러니까 얼른 가져와서 손에 살짝 짜주더라고. 오, 그런데 아주 촉촉하니 좋아! 극건성 피부라 촥촥 흡수되는 그런 느낌 좋아하거든. 그 쫀쫀함을 이미 느껴버렸는데 또 안 살 수가 없지. 가격? 호캉스 안 갔으니 하나 사지 뭐! 안 그래도 요즘 화장 좀 하고 나선 날에는 얼굴이 건조해서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는데 나한테 딱 필요한 거였어! 그리고 나는 하마터면 거기서 못 멈추고 눈 화장 코너까지 갈뻔했지 뭐야. 언니가 아주 장사를 잘하더라고. 그렇게 가까스로 멈추고 거금을 카드로 긁으며 생각했어. 이제야 딸에게 밀리지 않겠군. 며칠 후 엄마 화장대에서 그걸 본 딸은 눈을 세숫대야만큼 크게 부라리며 아무 말도 없이 진군하듯 제 방으로 들어갔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유는 모르겠어.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암튼.
아, 미안. 아까부터 암튼, 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네. 암튼, 그래서 생각지 못한 거금을, 결국 호텔 하루 숙박비보다 더 큰돈을 긁었지. 카드 명세서가 드르륵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어. 그래 이번 우울은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지나친 돈을 썼다는 죄책감이 우울을 압도해 버리거든. 그렇게 지갑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무거워진 상태로 터덜터덜, 아니 부릉부릉 집으로 돌아왔어.
우울이 찾아올 때 돈을 쓴다고 기분이 막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거 다 알아. 그런데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 보이지 않는 발의 모터에 시동이 걸린 느낌이랄까. 그렇게 한 번 시동이 걸리면 동동동 쇼핑몰을 배회하며 뭐라도 사야 해. 그리고 그 모터는 결국 카드 명세서 나오는 소리가 들려야 꺼져. 그러면 다시 느려진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한숨을 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영수증을 정리하지. 그리고 생각해. 안녕, 우울. 다음엔 너무 빨리 오지 마. 오래오래 쉬었다 와. 이렇게.
그렇게 한 번의 고비를 또 넘겼어. 나랑 비슷한 사람 분명 있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 쇼핑 말고 다른 방법으로 우울이든 뭐든 반갑지 않은 기분을 막아내는 사람 있으면 방법 좀 알려줘.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쇼핑이 가장 쉬운 방법이겠지만, 그거 말고 더 기발한 방법 있는 사람? 아, 책 읽는 거 말고! 책은 잔잔한 일상의 일부라 기분에 큰 변화를 끼치진 않더라고. 아무리 대단한 책, 아무리 재밌는 책이라도 말이야. 그리고 난 내향형 인간이니 사람들 만나라는 추천도 사양. 에너지 넘쳐야 하는 활동도 패스. 하하 좀 까다롭지? 어쨌든 둥실둥실 내 어깨에 또 살짝 우울이 내려앉을 것 같을 때 그걸 한 방에 털어버릴 수 있는 방법 아는 사람? 우리 좋은 건 같이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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