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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Nov 21. 2024

시티 오브 리터러쳐, 멜버른

혹은 시티 오브 소시지 


비 오는 멜버른의 아침, 오늘 아이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 처음 와보는 도시에 친구가 있다니! 조호바루에서 잠시 같은 학교를 다녔던, 지금은 멜버른에서 파운데이션을 하고 있는 친구다. 덕분에 나에게도 자유 시간이 생겼다. 나는 당연히 멜버른 서점 투어를 할 생각이다. 멜버른은 자칭 ‘문학의 도시 City of Literature’니까. 시내에만 각종 서점과 도서관이 서른 개 가까이 된다. 만화책 전문 서점, 독립 서점, 요리, 역사, 건축 등 각종 분야에 특화된 서점, 중고 서점, 고서적이나 희귀본만 취급하는 서점 등 종류도 다양하다. 


밖으로 나가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비는 참 이상하다. 그저 하늘에서 내려와 우산 위로 도도독 소리를 내는 물방울들일뿐인데, 마음속 층층이 쌓인 추억의 서랍을 활짝 열어버린다. 비에 홀딱 젖어 소리를 지르며 운동장을 뛰던 어느 여름밤, 하숙방에 들이친 거센 장맛비로 다 젖어버린 살림을 보며 속상해 울던 풋내기 대학 시절, 멋있는 척 비를 맞고 있던 짝사랑 오빠를 훔쳐보는 단발머리 소녀, 기념일을 맞아 예약해 둔 식당 가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 홀딱 젖어 식당에서 빌려준 수건을 뒤집어쓰고 스테이크를 썰던 오후, 한 치 앞이 안 보이도록 순식간에 쏟아져 버리는 비에 운전대를 잡고 덜덜 떨던 어느 날. 낯선 도시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걷는데 그 모든 추억의 서랍이 우당당 열린다. 


걷는 동안 보슬비가 굵어져 우산을 펼쳤다. 구글맵도 켰다. 가장 가까운 서점은 450미터 거리에 있는 엠포리움 쇼핑몰 안의 리딩스 Readings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분주한 사람들, 깔끔하게 정리된 새 책들의 냄새를 큼큼 맡았다. 물기를 잔뜩 머금었던 옷이 다시 보송해진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또 과학책 코너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옆에 아이도 없는데 나는 왜 또 과학책 앞에 서 있는가. 하지만 이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가 지금 읽으면 좋을 책들, 도움이 될 책들을 내 책 보다 먼저 고르는 일 말이다. 그러니 그동안만이라도 자꾸 멋대로 움직이는 발걸음을 이해하기로 하자. (이러다 이미 독립한 아이에게 택배로 책을 잔뜩 보내는 그런 엄마가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때는 내가 읽고 싶은 책들만 고를 시간도 부족할 테니 미리 걱정은 말자)



다음 서점은 또 거기서 750미터. 힐 오브 콘텐츠 북샵 Hill of Content Bookshop이다. 1922년부터 영업을 했다고 하니 벌써 백 년을 넘긴, 멜버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다. 깔끔한 체인 서점에는 없는 개성이 가득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치 몇 십 년 전으로 훌쩍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는 서점에서 만든 에코백들이 알록달록 걸려 있다. 마침 안락한 일인 용 소파에 자리가 나 잠시 앉아 책도 구경하고 사람들도 구경했다. 



한때 ‘서점’ 혹은 ‘책방’ 관련된 책들을 부지런히 모았었다. 서점은 아마 내가 처음으로 나의 취향을 확인했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가지런히 쌓여 있고 꽂혀 있는 모든 것들이 그냥 좋았다. 자주 드나들다 보니 어느새 책방 주인을 꿈꾸게 되었고 잠깐 동안 나만의 책방을 꾸려 사람들을 초대해 보기도 했다. 책들과 함께 하는 삶을 막연히 꿈꾸기 시작했던 어릴 적 그 서점, 그 안을 설레는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던 단발머리 내 모습이 아직도 눈만 감으면 선하다. 거의 24시간 아이와 함께 하다가 맞이한 이 고독한 시간, 멜버른의 백 년이 넘은 서점에서 어린 나를 만나는 지금 이 순간도, 비 오는 날 활짝 열린 서랍 한 귀퉁이에 고이 들어가겠지. 


다음 서점은 거기서 50미터. 작은 독립 서점인 페이퍼백 북샵 The Paperback bookshop이다. 어쩌면 서점마다 이렇게 분위기가 다른지. 손님들끼리 서로 어깨를 부딪히지 않게 조심조심 다니며 사고 싶은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겨우 내려놓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비가 멈춰 있다. 가보지 못한 서점은 아직 많지만 벌써 하루가 저물고 있기에 다시 숙소 쪽으로 걷는다.



그런데 금방 오겠다던 아이가 친구들과 저녁까지 먹고 들어온단다. 익숙한 상황이다. 아이는 친구들과 먹고 남편은 늦게까지 일하느라 나 혼자 저녁 먹는 일 같은 거. 일상과 다름없는 여행이로구나. 오는 길에 저녁거리를 사러 울월스에 갔다. 혼자서는 보통 가볍게 먹는 편인데 이상하게 소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소시지? 안 좋아하잖아? 그걸 직접 사서 구워 먹는다고? 애도 없는데 혼자? 누가 구워줄 것도 아닌데? 왜 한 번 먹어볼 수도 있지. 예전에는 많이 먹었잖아. 추억의 맛일지도 몰라. 


그렇게 비프 소시지 한 팩을 들고 먹을까 말까 고민하면서 마트를 몇 바퀴 돌았다. 황금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딱히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없이 동네 울월스에서 소시지를 들고 삼십 분 넘게 고민하다니. 누가 옆에 있었다면 가타부타 진작 결정이 났겠지만 혼자니까 이 놈의 고민이 멈추지 않는다. 그런 내가 나도 웃긴데, 그런 게 내 여행이지 싶다.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고민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걸로 오래 고민하는 그 시간이 내 마음을 알아가고 나만의 취향을 찾아가고 내 스타일을 쌓아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까지 알아가는 과정이랄까. 소시지 먹어 말어의 고민을, 살고 싶은 삶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시켜 버리는 이 엄청난 비약이 어처구니없을지도 모르겠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두 고민을 이어주는, 그 사이에 차곡차곡 쌓이는 온갖 잡다한 고민들의 시간이다. 삶이라는 마트를 빙빙 돌며 쓸데없는 고민을 넘치도록 해보는 그 사이의 시간들이다. 그런 시간들을 모아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를 찾아온 것 같다.


결국 소시지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와인을 한잔 마시며 지글지글 소시지를 구웠다. 어라, 룰루랄라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네? 다 익었나 잘라보니 가운데는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른다. 어쩔 수 없이 찹찹 잘라 구웠다. 양파와 호박도 숭숭 썰어 같이 볶았다. 에어비앤비에 식용유가 없어서 마트에서 산 작은 버터 하나로 모든 요리를 한다. 지나친 느끼함을 방지하기 위해 소금을 넉넉히 뿌렸다. 후추도 아쉽지만 후추까지 살 수는 없었다. 다 구워 빌딩숲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오! 완벽한 추억의 맛이다! 소시지를 냠냠 씹으며 쓰잘 데 없는 고민들을 어깨에 산처럼 이고 지고 다녔던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난다. 


아이는 해가 지기 전에 온다고 했는데 아직 오지 않았고 해는 이미 졌다. (겨울이라 다섯 시 반 정도면 일몰이다) 하지만 숙소 근처에 있다고 하니 더 놀다 오라고 한다. 각자 충만한 시간을 보내자꾸나. 소시지에 와인을 홀짝이며 밤을 기다린다. 37층의 통유리 너머 멜버른의 야경이 아름답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 참 잘 골랐다. 침실이 따로 있고 거실에는 소파와 티브이가 있고 부엌도 적당히 크고 깔끔하다. 두 사람이 밥 먹고 책 읽고 놀기에 적당한 식탁도 있다. 와인을 마시며 책도 읽고 글도 쓰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지면 각자 하던 일에 몰두하며 말이 없어진다. 그렇게 따로 또 같이 보내는 시간이 좋다. 37층에서 멜버른의 야경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도 추억의 서랍 속에 잘 넣어둘 것이다. 언젠가 그 서랍도 불쑥 열려 반갑게 나를 찾아오겠지.


통유리 너머의 밤이 진해졌다. 침대에 누워 거의 끝나가는 이 여행을 돌이켜본다. 다시 찾은 시드니는 반가웠고, 잠시 여행자로 머물렀던 멜버른은 거의 처음 만난 도시나 마찬가지였으며, 그동안 내내 추웠고, 우울은 조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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