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긴 끝맺음을 위한 짧은 다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번역투입니까?

by 둥둥


오늘의 퇴사 기상도를 먼저 보시겠습니다.

제 자리가 이번 달 말부터 비어질 수 있다는 예측이 높았던 가운데,

본사 인사전략팀은 해당 T.O.를 3월, 지금 공채 중인 신입사원으로 채우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주 전 금요일, 해당 발표가 나면서

마지막을 여유롭게 근무하며 퇴사 이후의 삶을 구체화 하겠다는 기대를 했던 본인은

살짝 실망한 상태입니다.

팀 내에서 인원조정이 이루어져, 저와 함께 일했던 담당이 맞은편으로 이동한 가운데,

새로 온 담당은 기존 업무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추세라면 1인 체재로 3월까지 버티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다만, 2021년 매출 계획과 주요 업무 보고 등으로 인해

실제 퇴사일은 1월 상순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둘 자리에 셋이 있다면, 식당이나 카페에서는 별로겠으나, 회사에서는 꽤나 좋은 일이다. 보통 셋 자리에 둘을 넣고 심한 곳에서는 넷 자리에 하나가 들어가 있기도 한다. 정기인사발령 두 달 전에 협조를 구했으니, 한 달가량 둘 자리에 셋을 넣어 운영하며, 나는 살짝 빗겨 나 있을 수 있다는 욕망은 꽤나 냉철하게 거절당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도 회사의 지능은 뛰어났고,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전 조직의 인원은 여기서 더 줄일 수 있었나 하는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여섯이 하던 일을 넷이 하게 된다고요!"를 소리치며 연착륙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했으나, 우리 지점을 제외한 다른 지점들은 다섯이 될 기미가 없는 넷인 곳도 있었다. "3월에 신입사원이 들어온다며, 그것만으로 꽤나 순조로운 것이야." 홀롤롤로 하며 아무 부담도 지지 않고 떠나려던 계획은 사뿐히 폐기되었다.


다행히, 다른 지점에서 새로 온 담당은 아주 뛰어나게 업무에 적응했고 두 달에 걸친 연마로 퇴사를 향한 마음은 꽤나 단단해져 있었기에 "이젠 네 결정을 모두 존중해줄게, 다만 몇 가지 요소만 고려해줘"라는 회사의 역공에도 의연한 척할 수 있었다. 당장 뛰어나가기에는 겨울에 약한 편이라는 종족적 특성을 내세우고, 스타벅스 다이어리에 퇴사 카운트를 적어간다. 그래서 언제냐고요? 아직은 일기예보 수준입니다. 한 달쯤 남았네요.


요란하게 빵 터지는 폭탄도 자욱한 연기를 남기지만, 새 나온 연탄가스처럼 내 퇴사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도망치거나 쫓겨나는 게 아니니 숨길 이유도 없고, 퇴사를 이유로 업무를 대충 할 생각도 전혀 없었기에 소식이 어떻게 퍼지고 있나 아주 흥미롭게 관찰 중이다. 본사는 물론 여러 지점에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소식이 되기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지점에서도 이미 명백한 사실인데, 다들 신기해하는 것 같다. 지난주에도 내내 야근을 했다. 물론, 일이 많으니까 어쩌겠나. 내가 팀장님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일하다 떠나겠다"라고 천명했기에, 오버티오였으면 또 모르겠으나, 밀려드는 일들을 휘리릭 던져두고 퇴근할 수 없었다. 2021년 업무보고를 본사에 마지막으로 송부하며, 신기한 새끼라는 칭찬을 듣고 나는 당당하게 퇴근한다. 아 1월엔 뭐하지 라는 고민은 여전히 남겨둔 채로.


10,11월에 손이 빠지게 바빴던 덕에 예년에 비해 팀 업무가 집중되어 있진 않다. 그 업무들이 10,11월에 중첩되었거든. 해서 내년도 월별 매출 목표를 짜고, 영업환경을 분석하고, 코로나 19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도를 하며 차근차근 2021년을 준비한다. 나도 내 월별 특이사항을 정리하고 예산과 비용을 추산하고, 목표를 정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집에 오면 전통자수를 내리거나 스팀과 넷플릭스를 헤매며 취향을 확인하고 있다. BTS, TXT, 오마이걸의 예전 뮤비들과 무대영상을 보다가 카오스 게임방송을 보다가 모닝빵에 사과잼을 발라먹거나 하다 보면 후다닥 자고 일어나 출근시간이 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룩한 평화인 것만 기어코 박차고 나가겠다는 명령어가 선입력 된 나에게 감사한다. 변화는 좋은 것이야.



퇴사를 하겠다는 마음이 흔들릴 때 보려고, 11월부터 회사에서 겪는 가슴 찢어지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부당한 업무지시나 의미 없는 자료 만들기 따위로는 이재 생채기도 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졌으나, 나이차도 얼마 나지 않는 담당들의 한계 없는 망발과 망언, 트롤링은 여전히 뇌를 터지게 한다. '갈통노트'라 이름 붙인 파란 하드커버 공책이 한줄한줄 채워가는 걸 보며 느끼는 쾌감이 얼마나 큰지.

혹시 가슴이 먹먹해지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상황이 자주 있다면, '갈통노트'를 적는 것을 추천한다. 이제 나는 저런 일이 생길 때, 망치를 찾아 서랍을 뒤적이지 않고 신나 하며 펜과 노트를 준비한다. 작가의 아이디어 노트만큼 소중한 나의 '갈통노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날을 기대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