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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둥 May 07. 2022

09. '그 카페'도 11년이 걸렸다

동백과 벚꽃을 지나야 장미가 핍니다

 남쪽의 벚꽃은 2월부터 피기 시작합니다. 1월 제주에서 동백꽃들 잔뜩 보고 왔어요. 목련은 동백과 벚꽃 사이에 펴서 벚꽃이 한창 필 때면 이미 무거운 꽃잎들 땅에 떨굽니다. 석촌고분 양옆의 벚꽃나무들이 꽃을 다 피우고 잎을 낼 때까지 거무튀튀하던 플라타너스들은 봄비가 내리고 나서야 조금 생기를 띕니다. 물론 고분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샛푸르다 검푸르다 해요.


 신촌에 파이홀이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굴다리 옆 언덕 위 외진 장소에 있었어요. 그때가 복한 한 학기니까 2013년입니다. 누구의 추천으로 갔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조용하고 파이가 맛있어서 자주 갔습니다. 한쪽 벽돌벽의 파란 코끼리 그림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인도에서 온 제가 아주 탐내 전등갓도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과 좋은 분위기, 좋은 파이는 파이홀을 외진 곳에서 신촌공원 쪽으로 움직이게 했습니다. 가게도 꽤나 커지고 파이홀을 찾는 사람들은 더 늘어났어요. 옮긴 곳에서도 사람은 좋고 분위기도 좋고, 파이도 더 맛있어졌으며 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휴학을 했다가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가 퇴사를 한 뒤 플로리스트가 되어 호텔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 파이홀이 리모델링 및 2층 확장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2012년부터 2022년까지니까 꼬박 11년이 걸렸네요.


 파이홀은 저에게 단순한 카페가 아닙니다. 입구 왼편에는 제가 도쿄에서 사 온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는 뉴욕에서 사 온 호랑이 인형이 앉아있습니다. 오븐 맞은편에는 선물 받은 브루클린 박물관의 달력이 있어요. 말도 없이 들러 꽃장식을 바꿔놓거나 과일을 놓고 가기도 합니다. 진상고객인걸 눈치채셨다면 다행이에요. 다른 손님들과 직원분들께 피해 주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종종 진상일 겁니다. 하지만 인연과 시간 때문에 제 가게처럼 뿌듯하고 더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신촌에 살 때는 한가하면 들러서 책을 읽거나 잠시 앉았다 가곤 했습니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꼭 데리고 가기도 했고요.


 파이홀은 4월 한 달간의 공사 끝에 1층 먼저 가오픈을 했습니다. 으레 그렇듯 2층 공사가 늦어지고 있어요. 아마도 5월 중순이나 돼야 2층에 올라가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지난주에 꽃이 많이 남고, 빨리 퇴근해서 버려질 꽃들을 들고 파이홀에 잠시 들렀습니다. 화병에 꽃을 좀 꽃아 두고 나무박스에 높이 꽃장식을 해두고 왔어요. 노란 버터색으로 바뀐 파이홀에 노란 파스타 거베라가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저녁 약속이 있어 훌훌 돌아와야 했는데 가게 앞 데크에서 꽃을 정리하는 모습이 웃겼는지 사장님이 인스타에 꽃과 함께 사진을 올렸어요. 출근용 옷이라 검정검정한데 다음부터는 좀 밝게 입고 머리도 좀 정리해야지 반성했습니다. 꽃은 제가 봐도 예쁘더군요,


 신촌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개인 카페라고 생각하는 파이홀도 언덕에서 내려와 2층을 확장하는 데 11년이 걸렸습니다. 주말 웨딩이 있는 날 아침 허겁지겁 뛰어다니며 대 세팅을 하고, 무릎걸음으로 걸으며 초에 불을 붙이다 보면 문득 불안이 샘솟곤 해요. 01년생 친구(나는 01년에 열한 살이었지만)와 나란히 앉아 유리병을 닦고 있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나를 그리고 내 브랜드를 만들 거라는 목표를 내뱉다가도 너무 먼 미래 같아서 불안하고 초라해질 때 가끔 파이홀을 생각하며 힘을 얻습니다. 그 맛있고 멋진 파이홀도 11년이 걸렸으니까, 30대가 제일 재미있다는 말처럼 마흔이 넘어서야 진짜 사는 것 같다는 얘기도 들었으니까 하며 다독입니다. 가장 힘이 되는 건 파이홀의 바나나치즈케잌이나 복숭아파이지만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삽시다.



 신촌에 가시면 꼭 파이홀에 들러보세요. 2층 오픈 전이라 아직 자리는 적지만 맛있는 파이를 예쁜 상자에 포장해 가실 수 있습니다. 계절과 사장님 마음에 따라 매일 파이 종류가 바뀌지만 대부분 마음에 드실 겁니다. 파이 이름들이 직관적이라 재료와 모양을 보고 편하게 고르셔도 돼요. 가끔 예상과는 달라도 맛은 있을 거예요. 맛이 진한 쿠기류들도 아주 추천합니다. 저도 선물용으로 대량 구매한 적이 있을 정도로 아주 맛있습니다. (이 멘트는 파이홀 관계자의 강요 없이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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