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
보통 영화를 볼 때 장르를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굳이 즐겨보는 장르를 꼽자면 '액션'과 '하이틴 로맨스'다. 두 장르는 다소 대척점에 있어 보이지만 내겐 동일한 화학적 작용(?)을 일으킨다. 엔돌핀이 퐁퐁 샘솟고 어느새 광대가 치켜 올라가 있다. 가끔 취향저격인 장면이 나와 영화를 멈추고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꺅꺅 지른다. 오늘은 하이틴 로맨스 중에서도 최근에 내가 푹 빠져버린 영화에 관해 적어보고자 한다. 이름하여 넷플릭스 오리지널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 혹은 TATB)'라는 영화다. 어느 점에서 설레고 방방 뛰었는지 교주를 영접하여 벅찬 교인의 마음으로 세세하게 글을 써볼 작정이다.
사랑한다고 말해, 프로삽질러들아!
여자 주인공 '라라 진'은 옆집에 사는 조쉬를 짝사랑한단 사실을 깨닫는다. 언니 마고와 조쉬가 사귀고 난 후에 깨달은 게 함정이지만. 그래서 그녀는 보내지 않을 러브레터를 적으며 자신의 마음을 정리한다. 이런 편지를 쓴 것도 벌써 5번째다. 캠프에서 만난 케니, 7학년 친구였던 피터, 홈커밍 파트너 루카스, 모델 유엔에서 만난 존 그리고 옆집의 조쉬. 일찍이 엄마를 떠나보내고 마음 한편에 누군가를 들여놓는 게 겁이 났던 라라 진은 로맨스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정작 자기의 로맨스는 상상에 그치게 한다. 친구라곤 언니 마고, 동생 키티, 조쉬와 크리스틴뿐인데 그마저도 언니 마고가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고 조쉬와 헤어지면서 그와도 어색한 사이가 된다. 야무진 키티는 금요일 밤 약속도 없이 자신과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언니가 안타까워 엄청난 강수를 두고 만다. 하나라도 걸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로 5통의 탑 시크릿 러브레터를 당사자들에게 보내는 것.
첫 번째로 반응이 온 남자는 피터였다. 피터는 7학년 때 게임으로 뽀뽀를 하게 된 상대이자 학교 퀸인 젠의 남자 친구였다. 운동장에서 뛰고 있던 라라 진에게 편지를 들고 와 마음은 고맙지만 최근에 젠과 헤어지고 정리가 안 됐다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데,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편지가 피터 손에 있자 그녀는 바로 기절하고 만다. 곧이어 정신을 차리지만 멀리서 조쉬가 편지를 들고 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패닉에 빠진다. 아무렴 언니의 구남친이라지만 제정신으로 조쉬를 대할 자신이 없는 그녀는 기지를 발휘해(?) 피터를 덮친다. 가까스로 조쉬와의 대면을 벗어났지만 덮침으로 인해 피터는 아직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착각한다. 어쩔 수 없이 지금 좋아하는 상대는 조쉬임을 밝히고 너에 대한 감정은 오래전 일이라며 선을 긋는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피터가 황당하게도 '사귀는 척을 하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사귀면 전 여친은 질투심에 불타 자신에게 돌아올 거 같고, 너는 조쉬와 불편한 사이를 피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그녀는 가볍게 무시했지만 자꾸 대화를 시도하는 조쉬때문에 피터의 제안을 수락하고 만다. 몇 가지 규칙과 함께. 어디까지나 사귀는 척이지만 점점 피터에게 마음이 열리고 서로의 가족과도 시간을 보내면서 정말로 그를 좋아하게 될까 봐 불안해진다! 피터가 언젠가 젠에게 돌아갈지도 모르기에 그와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는데, 어느새 같이 가기로 약속한 학교 스키 여행날이 와버렸다. 여행 중에 자꾸 자신을 찾는 피터를 피해보지만 그녀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고 친구들의 응원까지 더해져서, 이제는 자기가 피터를 찾아가게 된다. 그는 살짝 삐진 얼굴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밝힌다. 너와 버스에서 같이 먹을 간식을 사기 위해 멀디 먼 한인 슈퍼마켓까지 갔다왔다고. 그의 진심을 확인한 라라 진도 용기를 냄으로써 드.디.어 둘의 삽질이 끝난다. (짜식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았을 텐데, 아직 젠이라는 장애물이 남아있었다. Mean girls의 레지나 조지만큼은 아니지만 그 못지않은 성격으로 노련하게 둘의 사이를 해방 놓는다. 라라 진에게 오해를 산 피터는 열심히 해명하려고 했으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둘의 진한 스킨십이 담긴 영상이 유출되면서 둘의 사이가 더욱 벌어지고 만다. 휴- 과연 피터는 라라 진에게 한 때 사랑했던 남자로 그치고 마는 걸까? 아니면 현재 진행형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하이틴 아닌 하이틴이라서 더 끌리는 로맨스
이 영화에 푹 빠졌던 이유를 생각해봤다. 먼저 주인공들이 현실적으로 평범한 캐릭터들이라서 오히려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랄까. 온 전교생이 찐따(?) 혹은 가족들이 구제불능 취급한다거나 정서적, 성격적인 면에서 큰 결함이 있는 게 아니라 딱 그 나이 때의 평범한 소녀소년 캐릭터가 보인다. 나도 라라 진처럼 학창 시절엔 로맨스 소설을 즐겨 읽고 스스로를 주인공에 대입하는 걸 즐겼다. 친구 관계나 이미지에 신경 쓰고 행동이 과감할 때도 있었고 바보같이 쭈뼛쭈뼛 거리기도 했다. 이처럼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구축되고, 하이틴 로맨스 특유의 공감성 수치를 유발하는 중2병적인 장면들이 없어서 산뜻하게 볼 수 있었다.
또 인형 같은 옆태의 라라 진만큼이나 운동부 출신 & 학교 킹카의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는 피터 캐릭터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여자 친구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파티를 데려가도 되냐고 묻고 파티에서 술과 마약 대신 운전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콤보차를 마신다. 스키 여행을 갈 땐 여주인공이 평소 즐겨먹던 한국식 요구르트를 함께 먹기 위해 멀리 있는 한인 마켓을 찾아가 사오기까지 한다. 사귀는 척하는 사이 주제에 인스타그램에 우리 사진을 안 올린다고 찡찡거리질 않나. 그런 와중에 라라 진과의 스킨십 사진이 학교 내에 돌자 '니들이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고 엄포를 두기도 한다.
흑흑. 안 그래도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남주인공에 사족을 못 쓰는 편인데 이렇게 완성형 남자 친구인 피터가 눈을 찡긋거리기라도 하면 몇 번씩 영화를 멈추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의 매력은 나뿐만이 아니라 내 친구들을 포함 지금 전 세계 여성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지 요즘 밈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다. 이 추세로 보았을 때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총 3권의 원작 소설 중 1권을 영화화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글을 쓰면서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편지를 부쳐줄 여동생이 없어서 이토록 설레는 해프닝이 없었던 거 같다고! 에잇
P.S.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촬영 중에 이러고 잠들었다고. 너네가 친구 사이면 나는 친구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