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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el Sep 02. 2018

유한의 삶에서
무한의 음악을 찾는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를 보고

내게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시였다. 산문이자 유화였다. 때로는 수채화였다가 수묵화이기도 했다. 그의 곡들은 나를 쉽게 상념에 잠기게 하고 상상의 궤도에 갖다놓는다. 그의 이름이 생소할 수는 있다. 그래도 대부분 Merry Christmas Mr.Lawrence나 Rain은 들어봤으리라 확신한다. 개인적으로는 Opus나 A flower is not a flower를 즐겨 들었다. 한동안 그의 앨범만 쭉 듣다보니 내공이 생겼는지(?) 하루는 영화 속 사운드트랙이 참 류이치 사카모토의 느낌이 난다고 느꼈는데 엔딩 크레딧에 정말로 그의 이름이 나타났다. 참고로 그 영화는 레버넌트였다. 단언컨대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인이자 동경하는 영화 음악 감독이다. 최근 남산 끝자락에 위치한 뮤지엄 Piknic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다길래 반가워하던 중 8월의 마지막날과 9월의 첫날에는 특별히 루프탑영화제를 연다는 소식까지 보고 말았는데 도저히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운 좋게도 8월의 마지막날, 남산의 밤 공기와 서울 야경을 곁들이며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내고야 말았다. 


그의 음악은 생명과 죽음을 포용한다

영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피해지인 미야기현을 방문하는 류이치로 시작하고 끝난다. 그는 쓰나미에 휩쓸려 부서진 피아노를 쳐본다. 사람으로 치면 시체나 다름없는 피아노를, 그는 자연이 되돌려놓은 소리라고 평한다. 그리고 대피소에 방문하여 갑작스런 재앙에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작은 공연을 연다. 혹은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 반대 시위에 동참하여 목소리를 보태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의 저변에는 음악이나 문화는 평화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이 있다. 그의 신념은 뉴욕에서 거주하던 당시 9.11 테러를 목도하고 일생의 대부분을 음악에 둘러쌓여 살아왔을 그가 스스로 일주일간 음악을 듣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생긴 듯 하다. .

    그렇게 음악을, 사람을 사랑하던 그가 인후암 3기 판정을 받는다. 내 몸에 암이라니. 내가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니. 그는 진료 결과에 당연하면서도 농담처럼 들렸다고 한다. 20대 데뷔한 이후 처음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며 치료에 전념했던 그는 평소 동경하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레버넌트 음악 작업을 의뢰받고 고민에 빠진다. 아직 일을 해야할 때가 아니지만 어떻게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암에 걸리기 전보다 훨씬 줄어든 시간 안에 작업을 마쳐야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영화 마지막 황제에 쓰일 음악을 의뢰받고 일주일에 45곡을 작업한 적도 있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 사랑의 인트로 음악을 작업할 땐 오케스트라 녹음 5분 전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 감독이 곡이 마음에 안 든다며 수정을 요구하자 녹음을 30분만 미루고 급히 수정한 적도 있다고 한다.(이 때 수정하자는 감독에 말에 류이치가 난색을 표하자 던진 말이 압권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해주던데?' 이 말을 들은 그는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류이치는 테러를, 원전사고를, 암이란 생명을 앗아가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재정비한다. 영화에 바흐의 코랄 전주곡을 경이롭게 녹여내고 자연의 소리를 어우러지게 했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에게 영감을 받아 자연을 찾아 나선다. 무작정 숲속을 걸어가며 폐깡통을 두들겨보고 나뭇잎을 밟을 때 소리에 귀기울여도 본다. 비 내리는 날엔 집 안의 유리병을 몽땅 밖으로 꺼내보고 비가 사물을 만났을 때 자아내는 소리를 기다려본다. 기대하는 소리가 나오지않자 머리에 파란색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빗소리를 들어보는 장면은 괜히 뭉클해지기까지 했다. 세월은 컴퓨터를 이용하면 굳이 피나게 연습할 필요없다며 능숙히 기계를 만지던 20대의 천재 청년을 자연이 주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60대의 겸허한 거장으로 바꿔놓았다. 



인간은 언제 죽는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게 느껴진다

간단히 말해서 CODA는 데뷔부터 현재까지 그가 어떻게 곡을 만들어 왔는지, 그리고 암 투병이란 전환점에서 음악가로서 자신을 되살펴보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이다. 팬으로서 '도대체 이런 음악은 어떻게 만들어 내는걸까?' 늘 궁금했는데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는 타고나기도 했으나 끝없이 노력하는 천재였고 예술과 사람을 사랑하는 거장이었다. 동시에 소박하고 귀여운 아저씨라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영화 음악은 본질적으로 제약이 있지만 그러한 본질이 자신에겐 어떤 자극을 준다고 밝힐 땐 더없이 존경스러웠다. 죽기 전까지 후회없이 아름다운 곡을 만들고 싶다는 말에, 그의 삶은 유한할 지언정 그의 음악은 무한에 가깝다고 대답하고 싶다. 




눈물 나게 좋았던 자리 고마웠어요 피크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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