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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A Feb 19. 2022

괜찮아 청춘이야

때로는 좌절하고 절망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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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글2) 가난한 유학생의 미국 인턴 생존기


 적극적으로 문을 두들기는 자에게는 기회를 주고 노력한 만큼 결과를 되돌려주는,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시스템이 좋았다. 교환학생으로 있었던 미국의 학교의 대학원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다시 꼭 돌아와 더 깊이 공부해보겠다는 포부도 밝히고 돌아왔다.


 넓은 세상을 보고 커져버린 시야와 커져버린 나의 꿈. 자유로운 영혼의 드리머였던 나의 계획은 한국에 돌아가 대학원 준비를 하고 바로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두터웠다. 졸업 논문, 졸업, 취업. 현실 3종 세트가 내 눈앞에 바로 놓여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본 건 일 년이면 충분해. 자, 이제 너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세상은 마치 나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유학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 나는 일단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다.   




 요상한 나의 이력 덕분인지 지원 신청을 했던 회사들에서 서류 전형은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2차 인적성과 논술, 3차 그룹 면접, 임원 면접.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보니 이 바늘구멍처럼 좁디좁은 문 하나하나를 열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피를 말리는 일인지 몸소 깨달았다. 진이 빠져나갈 때 즈음 가장 먼저 지원한 곳에 덜컥 최종 합격했다. 7년 만에 뽑은 공채 인턴에 역대급 경쟁률이라며 주변에서 많은 축하를 받았다. 나도 흔들리던 마음을 다 잡고 뒤에 남아 있던 타 회사들의 면접도 포기한 채 이곳에 올인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의 공식 첫 사회생활. 남들이 말하는 소위 꿈의 직장이기도 했고 이곳은 나에게도 동경의 장소였다. 겉으로는 굉장히 화려하고 우아해 보여 그런 일을 할 거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야근에 찌든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 손 발을 맞춰가던 나의 사수는 스카우트를 받아 다른 곳으로 이직했고 나는 과장님 바로 밑에서 일을 배우며 많이 성장했다. 매일 10시 퇴근에 주말도 없이 일했지만 그때는 그것조차도 좋았다. 열정이 넘치던 청춘이었으니까.


 그렇게 1년 동안 7개의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고 직원 계약 전환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회사는 우리 11명의 공채 인턴들을 모두 직원 전환하겠다고 계약서에 도장도 찍어 놓고는 갑자기 말을 바꿔 단 3명만 채용한다고 통보했다. 것도 문자로.


불행히도 나의 이름은 나머지 8명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다.


 내 인생 일대의 큰 시련이자 좌절. 사회생활 불합리의 끝판왕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노동부에다가 신고라 해볼 일이지만, 이십 대 초중반의 우리 인턴들이 거대 조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했나 보다. 아무도 사측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고 각자의 짐을 싸서 조용히 그곳을 나왔다. 유학을 가려던 꿈 많던 나는 현실에 순응해 꿈의 직장에 들어갔다가 일 년 만에 백수가 되어 돌아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일을 못했나? 혹시 성실하지는 않았나? 이유가 뭘까? 그때 여기가 아닌 더 조건이 좋았던 다른 회사 면접을 갔더라면...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이유도 모르는 채로 그야말로 당해버린 나의 첫 직장에서의 상처. 그건 첫사랑의 실패보다도 더 쓰디 썼다. 처음 감정은 사측에 대한 분노였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화살을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길고 긴 자책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깊은 동굴 속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었는데 마침 가까운 분이 회사를 설립하는데 창립멤버로 참여하겠냐고 물었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이미 창립멤버가 되어있었다. 단 세대의 노트북과 단출한 사무실 집기로 시작한 10평짜리 오피스텔. 명함에는 팀장으로 박혀있지만 경리부터 행정, 인사, 기획, 제작, 마케팅, 홍보, 전국투어매니저 등 전방위 업무를 도맡아서 했다. 얼떨결에 장화신고 들어간 흙밭에서 밭도 갈구고 씨앗도 뿌리고 꽃도 틔웠다. 잠깐 일줄 알았던 이 곳에서 7년을 함께했다. 8대의 데스트탑을 둔 40평짜리 사무실로 이사할 때, 국가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살림이 조금 넉넉해졌을 때, 개인적으로는 국가에서 표창장 받고 회사로도 여러 상을 받아 대외적으로 우리의 활동이 인정 받았을 때. 7년간 늘 좋았던 일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마치 아이 키우듯이 이 작은 회사를 동료들과 함께 키워가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20대 나의 모든 열정을 여기에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보란 듯이 해내는 모습을 첫 직장에 증명해 보이고 있은 마음속 상처가 열정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남들은 이십대가 짧다고 하는데 나는 나의 이십대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때로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도 하고 때로는 자책의 동굴 속에서 웅크리며 지내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망설임이 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던 나의 청춘.

뜨겁고도 찬란했던 나의 청춘에게 그만하면 잘 살아냈노라 최선을 다하였노라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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