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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A Feb 08. 2022

가난한 유학생의 미국 인턴 생존기

뜨겁고도 찬란했던 나의 청춘


(이전글) 내 청춘의 기록 열 권의 다이어리


Sanfrancisco International Arts Festival



패기 넘치게 미국 회사에 가겠다고는 했는데 막상 가려니 잘 곳부터가 문제였다.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나의 미국 체제비가 부모님께는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글로벌 금융 위기로 환율은 1,500원 넘어가던 시절이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길 바라셨을 거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면 미국을 다시 오기는 어렵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마침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내 여고 동창 집에 얹혀 지내기로 했고 엘에이에서는 한국인 여학생들과 룸을 나눠 쓰는 값 싼 셰어하우스에서 머르며 최소한의 체제비 안에서 살아갈 계획을 세웠다.



미국 인턴의 경험은 학교 다니는 것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완전한 프로의 세계, 진짜 삶의 현장에 한 발 들여놓게 된 것이다. 먼저 시작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국제 예술 축제에 프로덕션 인턴으로 참여했다. 프로덕션 매니저 패트릭과 딜런은 처음 나를 보자마자 황당해하며 어드바이저인 쿄코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아마도 건장한 남자 인턴을 원했는데 아주 왜소한 아시안 여자아이가 인턴으로 올 줄은 몰랐나 보다. 가자마자 내가 맡은 업무는 조명 달기.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 천장에 조명을 거는 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조명기를 들고 사다리에 올라가 몽키 스패너로 볼트를 조였다. 등 뒤로 불안해하는 매니저들의 눈초리가 따갑게 느껴졌다. 그 뒤로 며칠간 수십 개의 조명을 달고 떼는 작업을 했다. 예상외로 이 일을 잘 해내고 있는 나를 보며 매니저들은 조금 놀랐던 것 같다. 처음에는 점심시간에 옆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혼자 대강 때웠는데 어느새 매니저들이 나에게 먼저 함께 밥을 먹자고 손 내밀었다. 안 되는 영어로 말하는 일보다 몸 쓰는 일이 사실 내겐 훨씬 더 편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한국에서부터 방학 때마다 조명 크루 알바를 해온 바. 말 안 하고 조명 다는 일은 내게 찰떡인 업무였다.









전 세계의 유수한 공연단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였다. 나는 프로덕션 인턴으로 그들의 공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 역할이었다. 그 당시에도 전쟁 중이던 시리아. 그곳에서 온 연출가에게 시리아의 상황을 듣기도 했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공연단들을 맞이하며 그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작품들의 예술성 또한 학교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이국적으로 독특했던 러시아팀의 마임은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펍에서 공연을 올린 나체의 무용수의 몸짓은 살아있는 아름다움이었다. 멋진 공연들공짜로 보며 일도 할 수 있었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3주는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나를 믿고 뽑아준 어드바이저 쿄코 상과 앤드류, 처음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나중엔 누구보다 나를 잘 챙겨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패트릭과 딜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엘에이로 떠났다.








내가 도착 한 곳은 LA 근방의 문화원이었다. 스패니시 풍의 아담하고 예쁜 공간이었는데 일은 적지 않았다. 꽤 크고 잘 정리된 조직이었고 업무 매뉴얼도 잘 되어 있었다. 매일 알찬 프로그램들로 꽉 차 있었고 나 이외에도 주로 LA 부근의 대학을 나온 다른 인턴들도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예술행정가 Jannet의 어시스턴트. Jannet은 재미 교포 3세로 한국말은 할 줄 모르나 같은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 나를 특별히 잘 챙겨주었다. 인턴 출근 둘째 날에 시 의원 회의가 있었다. 나는 나의 사수 Jannet과 함께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다과를 세팅했다.


회의가 끝나고 홀로 마지막 정리를 하고 나오는데 남은 빵들이 눈에 밟혔다. '남은 빵들은 버리려나? 저 빵 들이면 일주일 아침 식사가 해결될 텐데....' 그 순간 뭐에 씌었는지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누가 볼 새라 남은 빵을 봉지에 빠르게 챙기고 있었고 마침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다른 부서 직원 Matt의 파란 눈과 딱 마주쳤다. 타국에서 온 23살 여자 장발장이 된 순간. 얼굴은 빨개졌고 뇌와 입은 얼어버려 무슨 말이라도 뱉어야했을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아... 망했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던 순간이다.



Matt은 그냥 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 어색하고 애매해진 나의 이미지와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출근하기 정말 싫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출근은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문화원에서 한국의 용인시와 자매도시 교류 미술 전시회를 열어 한국 예술가 12명을 초청하는 프로젝트에 나와 Matt가 담당자로 지정되었다. '아... 가장 피해 다니고 싶은 분과 매일 마주해야 하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Matt와 어색하게 차를 타고 공항에 예술가들을 마중 나갔다. 한국인 직원이 있을 줄 몰랐던 예술가들은 나를 보고 몹시 반가워했고 그때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예술가들과 Matt의 소통의 다리가 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의 언어를 연결시켜주었고 세심하게 모두를 챙겼다. 전시회라는 큰 프로그램이 성황리에 끝나고 대망의 LA 관광 프로그램이 남았다.



Matt과 나는 문화원을 떠나 서로를 의지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Matt는 큰 벤을 모는 기사가 되었고 나는 그의 옆 조수석에서 통역과 가이드 역할을 했다. 우리는 12명의 한국 예술가들에게 디즈니랜드, 할리우드, 게티 뮤지엄, LACAMA, 디즈니 콘서트홀, 라구나 비치 등 LA 곳곳을 관광시켜주었다. 물론 이곳들은 나에게도 처음인 곳들. 일하면서 관광까지 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참 좋았다. 한국인 13명과 늘 함께 다녔던 Matt은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던 한국인 특유의 오지랖(좋은 말로 챙김과 정)에 점점 익숙해져 갔고 급기야 광란의 노래방 문화까지 경험하면서 완전히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Matt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음악 취향이 비슷하다는 공통점도 찾았다. 처음의 애매했던 이미지는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는 꿍짝이 꽤 잘 맞는 동료가 되었다.



문화원에서의 인턴도 이제 끝이 보이는 시점이 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고 디렉터님, 직원들, 인턴들, 특히 Matt과도 끈끈해져서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꼭 한국에 놀러 오라는 말을 여럿차례 남기고 문화원을 떠났다. 번외로 2년 뒤 정말 디렉터님과 Matt은 자매 도시 용인과의 업무 건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그때도 나는 그들의 일일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20대 초반의 왜소한 동양인 여학생이 미국의 낯선 도시들을 종횡하며 학교 다니고 일까지 한 것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그땐 내가 가진 것이 패기와 열정뿐이라 어떠한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던 것 같다. 좋은 사람들만 만났고 발 딛었던 곳들이 안전한 곳들이었음에 다시 한번 큰 안도와 감사를 느낀다.



가끔은 낯 뜨거운 실수도 하고 편견에 부딪혀 나를 증명해보여야했던 불완전함의 미학이 가득했던 나의 이십대 초반 미국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고 나는 다시 한국, 내 집, 내 자리로 돌아왔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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