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I Jun 10. 2021

취미 아닌데요

시작은 취미였다.


그냥 재밌어 보여서, 누구나 쓰는 글씨니깐 금방 잘할 수 있을 수 있을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워낙 다양한 분야에 관심사를 두고 있고 또 금방 금방 식는 스타일이라 스스로도 조금 하다 안 맞으면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남편을 비롯해 주변에 나를 잘 아는 가족, 친구들도 내가 캘리그라피를 한다니까 “아~ 좋은 취미지 한 번 해봐”라며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끄럽지만 그동안 나에게는 기초 단계까지 살짝 발만 담그고 나온 취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30회 끊으면 할인해준다는 말에 ‘30회 정도는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야심 차게 등록한 필라테스도 10회까지는 열심히 다니다가 슬슬 빠지기 시작하면서 15회 정도에서 멈췄다. 당연히 환불은커녕 기간이 만료되어 남은 15회는 버려야 했다. 우아하게 꽃꽂이도 해보고 싶었다. 플라워 클래스를 등록하고 한 회, 두 회… 음… 내가 생각했던 꽃꽂이랑은 다르네.. 꽃 꽂는 시간보다 꽃 다듬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줄은 등록하기 전엔 정말 몰랐었다. 그 외에 발레, 피아노, 가야금, 수영, 댄스, 기타 등등..  


하나의 취미만 꾸준히 하기엔 이 세상에는 재밌어 보이는 취미들이 너무 많았고 시간은 부족했다. 퇴근하고 나머지 시간을 쪼개서 취미 활동을 할 정도로 취미 콜렉터, 열정 부자였던 나는 '기획자라면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봐야지'라는 명분으로 조금 배우다 그만두고 또 새로운 것을 배우러 가는 솜털처럼 가벼운 나의 엉덩이를 합리화시켰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어느 날인가 우연히 TV에서 본 노트북에 펜으로 쓱쓱 글씨를 쓰는 광고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역사를 바꾼 건 항상 pen이었다.'라는 카피에, 맞아 맞아! 역사를 바꾼 건 펜이었지 하며 그 광고에 빨려 들어갔다. 아마 그즈음이 태블릿이 나올 때쯤 아니면 그 전이었을 것이다. 노트북에 키보드가 아닌 펜으로 글씨를 쓴다는 것도 획기적이었고 카피도 매력적이었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그 글씨였다.


도대체 이런 글씨는 누가 쓴 건지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글씨가 캘리그라피였다는 것도 그 글씨를 쓴 분을 캘리그라피 작가라고 하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빛의 속도로 지나간 광고 한 편의 글씨에 매료되어 이걸 꼭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취미 열정이 샘솟기 시작했지만 그때의 난 묶인 몸이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창 육아에 몰두하여 있을 때였고 화장실 갈 시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아이들의 부름에 응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끝이 안 보이는 캄캄한 긴 터널과 같았던 두 아이 영아기 육아. 나는 엄마로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일과 취미에 쏟았던 열정까지 탈탈 털어 정성껏 아이들을 키웠다.


곧 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리 라고 생각했던 건 완전히 오산이었다. 육아는 그 후로도 5~6년 지속되었고 나는 서류상 완벽한 경력단절 여성, 전업맘이 되어있었다. 워커홀릭, 취미 부자였던 '나'는 점점 사라지고 진득하니 인내심이 깊은 '엄마'의 모습만 남았다.

 

둘째가 두 돌이 되었고 어린이집도 다니게 된 그 무렵, 무작정 2년 전 본 그 광고의 글씨를 쓴 작가님을 찾아 캘리그라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단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재미가 있다.


이번에도 내가 한 3개월 하다 말 거라고 생각한 남편은 점점 진지해지는 나를 보고 약간 겁이 났나 보다. 어느 날 남편이 물었다.


“그냥 취미 아니었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근황 토크를 하다 여전히 캘리그라피를 하고 있다는 말에 친구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걸로 돈 벌 수 있어?”


나도 몰랐다. 내가 단타로 빠르게 갈아탔던 수많은 취미들 중 이 '글씨'라는 분야만 2년 넘게 붙잡고 있을 줄은. 심지어 돈도 벌게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아마도 육아를 하며 키워놓은 근성과 무한한 인내심, 그리고 오랜만에 나온 세상과 취미에 필사적이었던 마음이 나를 이토록 정적인 취미인 글씨 쓰기에 몰두할 수 있게 해 준 게 아닐까 싶다.





세상이 변해서 다행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N잡러, 부캐 같은 신조어가 생기질 않나, 본업이 아닌 다른 것들, 취미 또는 부업 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해야 해서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나쯤은 모두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회 분위기가 된 것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취미였던 것이 일이 되고 부업이었던 것이 전업이 되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취미였던 글씨 쓰기가 전업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결국 끝까지, 즐겁게 해내는 사람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로 ‘돈’ 벌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가 아니라 끝까지 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다.

나도 ‘글씨’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또 새로운 다른 것을 찾아 떠날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며 선언한다.


취미 아닌데요.


글씨 쓰기에 진심입니다.

이전 03화 괜찮아 청춘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