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 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스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김훈
아침,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의 김훈 편을 읽으면서 저 문장에 붙들렸다.
깜깜했던 주위가 어느새 환하게 밝아졌고, 아직도 나는 저 문장들을 읽고 또 읽는다.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느껴지지 않으려면 30년쯤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슬픔이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 풍화돼 없어진다니, 절절했던 사랑도 잊혀가고 없어진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계속 이런 아린 아픔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건 벌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직 끌어올려 말하지 못한 것은 자책이었다.
그를 너무 믿어 버렸다는 자책,
고집스러운 사람이니 내가 잔소리를 한다고 듣지 않았을 것이라 내 버려두었다는 자책,
일찍 들어오라고, 운동을 좀 하라고, 술 종 그만하라고 잔소리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나를 무너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