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가 좀 안된다고 했던 말에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왔고 약을 먹었는데도 계속 그렇다고 했다.
아니, 건강했던 사람이 왜 그럴까 했다.
무거운 화분을 들어 옮겼는데 담이 들었나 한의원에 갔고 간 김에 한약도 지었다고 했다.
뭔가 몸이 불편하다고 처음으로 남편이 말한 것은 6월 말경이었다. 바쁜 학기말 업무 중이었고, 너무나 건강한 사람이라 정말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7월 중순이 되면서 등도 좀 아프고 소화도 안된다고 계속 말할 때 이번에는 함께 병원에 가서 어디가 아픈 건지 원인을 찾아보자고 할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아예 입원을 해서 검사하기로 인근 종합 병원에 갔다.
환자복을 갈아입은 남편의 모습을 보며 장난을 쳤다.
"이렇게 입으니 진짜 환자 같아요."
병원에 들른 아이들과 기념으로 남겨놓자며 인증샷을 찍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후에 학교 갔던 아이들이 병원으로 왔다. 병원 식사를 하는 모습을 찍으며 아이들과도 깔깔 웃었다. 남편은 입을 쩍 벌린 모습, 환자복을 걷어 올려 배를 드러내며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주말이라 병원은 조용했고,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늘 하던 대로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아직 식지 않은 여름밤, 병원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이런 낯선 경험도 좋다 했었다.
주말을 그렇게 보내고 월요일 오전, 갑작스러운 분위기가 바뀌었다. 왔다 갔다 하는 간호사도 분주하고 담당의사도 일찍부터 들여다보고, 여러 가지 검사를 추가로 더 했다. 의사가 결과를 말하는 데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수치가 많이 안 좋다, 우선 대학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말만 알아들었다. 단어는 들리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고 배 속 깊숙한 곳에서 너무 찬 기운이 올라와 몸의 털이 다 솟는 것 같았다. 서둘러 대학 병원에 입원을 하고 다시 검사를 진행할 동안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딱 열흘만 이었다.
그 열흘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교수님은 한 3개월을 말했다. 수술적 치료가 불가능하지만 표적치료제를 쓸 것이고 드라마틱하게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니, 호전되면 수술적 치료도 해 보자는 긍정의 말도 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가족들과의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도 했다. 병원에서 머문 기간 동안 남편의 생일이 있었고, 아이들이 집에서 서툰 솜씨로 미역국을 끓여왔다. 그날 남편은 표적치료제를 받아 들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약으로 치료해 주시고, 힘을 얻어 이 병을 이겨낼 힘도 주시옵소서. 약의 효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으니 일단 병원에서는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우리는 일단 보성의 자연 치유하는 곳을 가기로 했다. 목사님을 통해 소개받은 곳이라 멀지만 내려가자 했다. 학교에 들러 간단하게만 짐을 챙겨 왔다. 교감님과 행정실장님께 인사를 나누며, 몸 회복하고 건강하게 만나자는 인사를 나눴다. 나는 교장실의 짐을 챙겨 오고 싶었는데, 남편은 돌아올 거라며 그러지 말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머리를 짧게 자른 남편이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기대 잠이 들었다. 몸은 좀 야웠지만 저렇게 건강한 사람이 시한부 진단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워낙 건강했고 씩씩한 사람이니 함께 내려가서 몇 개월 치료하고 올라올 마음을 먹었다. 마음이 바빠져서 나도 집 앞 미용실에 얼른 갔다. 짧게 잘라달라고 했다. 더 짧게 더 짧게. 대충 필요한 짐을 쌓고, 건강죽을 만들어 먹으며, 우리는 이겨내리라 믿었다.
그러나 하루를 못 넘기고 남편은 통증에 주저앉았고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치료제를 먹었지만 거짓말처럼 남편은 기운이 떨어졌고, 먹지 못했고, 휠체어를 타야 했고 복부가 부풀어 올랐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놀라 찾아왔지만 대부분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형님처럼 의지하며 지냈던 오 교장님 앞에서는 "형, 나 아파!"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남편은 대부분 의연했다. 유일하게 끝까지 만난 분은 목사님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목사님과 사모님이 우리 가족과 함께 있었다. 호흡이 어렵고 조금씩 몸이 식어갈 때 남편은 입술을 움직여 마지막 말을 남겼다.
"천국에서 만나, 고맙습니다."
대학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렸고, 급성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아 든 지 열흘만에 남편은 내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것은 나에게 마치 교통사고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