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갑작스럽고 짧았던 마지막 즈음에도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사해야 할까? 난 혼자 그 집에 들어가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이사하지 말고 그냥 살아. 괜찮아.” 했었다.
장례를 마치고 오래 비워두었던 빈 집에 들어설 때, 현관문을 여는 것이 두려웠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 두려움 없이 그냥 마음이 평온했다. 다행이다.
짐을 많이 정리했다. 한 달 이상을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정리하면서 이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들에게 말했을 때, 아들 녀석은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는데, 고집스러운 딸아이가 절대 이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 이사하고 싶으면 엄마와 오빠만 가라고, 자기는 그냥 여기서 살겠다고. 그 고집 덕분에 2년 가까이 그냥 이 집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곳에서 더 머문 것은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이 집에 이사를 들어올 때 남편은 참 정성껏 인테리어에 신경을 썼다. 전체 콘셉트부터 작은 소품, 특히 전등에 관심이 많아 인테리어 사장이 귀찮아할 정도로 요구사항이 많았다. 심지어 이사하는 날 나는 정상적으로 출근을 하고, 남편이 연가를 내서 이사를 했는데,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니 고대로 쉬면 되도록 청소까지 깔끔하게 끝내 놓은 상태였다. 현관 입구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문구를 원목 현판에 새겨 걸어두고, 심지어는 쓸고 닦는 것을 나보다 더 했던 것도 같다. 가정을 소중히 여겼던 만큼 집을 참 귀하게 여겼던 사람이었다.
이제 이 집을 떠나 난 이사를 한다.
하루아침에 쳐들어온 적군처럼, 위층의 무자비한 층간소음이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니, 위층에 사람이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참 길었는데, 어느 날 퇴근하고 거실에서 책을 보다가 위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에 놀랐다. 며칠을 참고 견디다가 한 번은 올라가 이야기를 했다. 벨소리에 내민 얼굴은 비교적 젊은 분이다. 알아듣게 설명했다고 생각했으나 그 이후로 위층의 소음은 지속되었다. 도저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사를 해야겠어!
딸아이가 고집을 부려 눌러앉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했었다. 함께 한 추억이 가득 담긴 이 공간을 도망치듯 휙 떠나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이들과 아빠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위층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딸아이도 위층의 소음을 힘들어했다. 허락하듯 이사해도 좋다는 말을 했을 때, 나도 이젠 이사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남은 가족은 이곳에서 충분히 지냈고, 충분이 추억했고, 충분히 울었고, 이젠 더 이상 울지는 않게 되었다.
이사를 해야지 결심하고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 어디로 자리를 잡아야 하나?
- 내가 원하는 조건, 도서관 가까이, 숲이나 공원 가까이
- 교통은 괜찮을까?
- 집을 팔고 새로 사야 하나? 아님 전세를 주고 전세로 가야 하나? 등등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선배가 이 곳을 소개해 주었다. 내가 생각하는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그 동네라며, 자기도 거기 이사할까 해서 몇 번 둘러본 곳이라며 강추라고 했다.
결국 난 지금 지내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과 공원으로 둘러싸인 비교적 큰 아파트 단지를 찾아냈다. 창을 열면 바로 산자락이 눈앞에 펼쳐지는 아파트라 아직 물이 오르지 않은 아카시아 나무만 보았는데, 싱그런 아카시아 향기가 나는 듯 맘에 쏙 드는 집을 찾았다. 아파트에서 곧바로 산 진입로가 있고 등산코스가 아기자기하게 연결되어 내가 시간 날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 야트막한 능선이 길게 보인다. 세상에 이렇게 마음에 쏙 들다니! 게다가 아파트 자치회와 구청이 연결되어 작은 도서관도 만들었다. 단지 내에 있고 제법 많은 책이 구비된 도서관이 내 차지가 된 듯 뿌듯하다. 앗! 그런데 이곳엔 전세 물건이 없고 매매 물건만 하나 있다.
'요즘 집 매매가 잘 안된다는데 어쩌지?'
'우리 집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안 팔리면 전세로 놓고 대출을 좀 받아서 이사하면 되지 뭐!'
인테리어를 워낙 깔끔하게 해 놓아서인지 우리 집은 부동산에 내놓은 지 이틀 만에 매수인이 나섰고, 나도 원하는 집을 곧바로 계약하게 되었다.
이번에 이사를 가게 되면 난 대부분의 물건은 모두 버릴 생각이다. 집은 심플하게 인테리어 하고, 아주 단순한, 그야말로 미니멀 라이프에 충실하게 꼭 필요한 물건만 놓고 살 것이다. 이전의 나를 벗어내고, 새로운 나로 살아가기 위해 공간을 바꾸고 물건을 바꾸고, 무엇보다 시원한 산바람 같은 새로운 감정을 내 맘 속 깊이 불어넣을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둘러본 아파트 단지에, 햇살 좋은 곳에서는 벌써 이른 꽃들이 만개하고, 뒷산 자락에는 뽀얀 쑥이 향기롭게 자라고 있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새롭게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사를 하고 한 달쯤 지나서야 나는 아파트 뒤편 산자락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산책하듯 가벼운 신발과 물 한 병만 들고 나선 걸음이고 조금만 걷다가 얼른 올 생각이었다. 능선을 따라 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멈춰 섰고, 주저앉았고, 줄줄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 남편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운동하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 어디 가자고 해도 잘 따라나서지 않는 편이었다. 어느 주말, 혼자 잠깐 둘레길이나 걷고 온다며 집을 나선 남편은 사진 몇 장을 찍어 보내 놓고 전화를 했었다.
"야, 여기 참 신기하다. 산이 깊지 않고 둘레길이 쭉 이어졌는데 바로 아파트 단지를 둘러싸고 있어. 제법 단지가 큰 걸. 여기 좋다야."
"보낸 사진 봤어? 여기 좋지? 이 나무 안내판도 아기자기하고. 별로 가파르지 않아. 다음에는 꼭 같이 오자. 어? 알았냐고."
내가 멈춰 선 자리에는 남편이 찍어 보냈던 안내판, 아파트를 한 바퀴 돌며 이어지는 능선길이 내 눈 앞에 있는 것이다. 남편은 이 길을 걷다가 전화를 했던 거였다. 나는 내가 이 곳으로 오게 된 것이 선배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데 남편이 이 곳으로 보내주었다는 생각을 확신처럼 하게 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한참을 주저앉아 더 울었다. 꺼이꺼이 소리 내며 난 한참을 더 울었다.
"당신이 이곳으로 오게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