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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이겨먹고 싶은 마음

by arimu

요가에서 물구나무서기에 성공한 후로 어디서든 기회만 되면 자랑을 한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남친과 친구들 앞에서도 맨 땅에 머리를 박고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릴 때마다 “우와!”하는 감탄을 듣는 게 즐겁다. 중력을 거스르고 거꾸로 하는 직립은 일견 화려해보이지만 조금의 근력과 용기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정말이다. 의외로 간단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신기해하니 마음은 우쭐할 수밖에.

학원에서도 그랬다.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시리즈 끝자락에 자리한 물구나무서기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많은 초심자들이 막연히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걸 알기 때문에 공중에 다리를 들어 올릴 때면 마음이 복잡했다. 우쭐하면서도 민망하달까.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하는 것처럼 비칠 것 같아 걱정했다. (참, 이상한 성격이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동안 거꾸로 된 시야가 눈에 들어왔다. 벽을 지지대 삼아 연습하는 사람,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 ‘에라이 모르겠다’ 포기하고 드러누운 사람 등. 그런데 그중 한 분이 서서히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물구나무서기에 성공했다. 평소 은근 경쟁의식을 느끼던 분인데, (물론 나 혼자) 나는 바로 이겨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내려 올 때까지 절대 먼저 내려가지 말아야지. 난 그렇게 혼자서 시합을 벌였고 이겨 먹었다. (참, 이상한 성격이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고자질하기 위해서다. “어이가 없어서, 또 이겨먹겠다고 부들부들 떨면서 버티고 있더라니까. 아니 누가 신경이나 써? 이겨먹어서 어따 쓰게. 왜 그러는지 몰라, 정말” 남 흉보듯 그렇게 자신을 한바탕 비웃고 나면 스스로 엄청 쿨한 사람이나 되는 줄 안다. 이상한 고해성사다. 그럼 남자친구는 말한다. “그러게. 왜 그 모양일까. 너는.”

난 88년생으로 88만원세대다. 늘 경쟁하며 살아왔고 조바심과 부산스러움이 매일 거르는 아침밥보다 당연했다. 친할수록 이겨먹고 싶었다. 친구가 읽는 책은 나도 다 읽고 싶고, 그 애가 가본 곳은 나도 모두 가보고 싶었다. 성적도 비슷해서 죽어라 공부했다. 지기 싫은데 자꾸 지니까 급기야 친구한테 화를 냈다. 왜 자꾸 이겨먹냐고.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궁금하다. 뼛속까지 사무친 이 경쟁본능은 타고남일까, 아니면 신자유주의와 함께 나고 자란 불운한 세대적 운명일까.

문제는 이겨먹고 싶은 마음의 함정이다. 난 정말 쓸데없는 것들에 경쟁심을 느낀다.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후론 남들이 누리는 여가와 낭만까지 질투하기에 이르렀다. 여행을 가든 맛있는 것을 먹든 예쁜 길고양이를 만나든, 열심히 찍는다. 올린다. 그것이 가장 시급하고 우선되어야 할 일이 되어 버렸다. 난 무엇을 자랑하고 싶은 걸까. 무엇을 이겨먹고 싶은 걸까.

최근 브리짓슐트의 《타임푸어》를 재밌게 읽었다. 저자는 워싱턴포스트의 유능한 기자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그녀는 좋은 엄마, 흠결 없는 엄마도 해내고 싶어 한다. 육아와 집안일, 기사작성을 동시에 하다보면 하루가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 그녀가 딸에게 그리스 여신 생일 파티를 열어주기 위해, 석고로 만든 이오니아식 기둥을 빌려와 뒷마당을 올림푸스산으로 변신시켰다고 했을 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나의 가까운 미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잉모성과 육아경쟁에서 나는 또 얼마나 피터지게 싸울까. 부모님이 자식 자랑 하는 걸 볼 때마다 눈을 흘겼는데, 아마 나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이겨먹고 싶은 마음이 또다시 동할 테니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브리짓슐트처럼 묻게 되지 않을까.

“나 지금 뭐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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