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요가수업에 초등학교 3학년쯤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잇살이라는 게 전혀 없어서 작고 단단한 몸이 보기 좋았다. ‘예쁜 요가복을 입었구나’ 어느새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 나. 관찰 모드가 되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 온 듯 했다. 어른들 사이서 태연히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조금 당돌해 보였다. 익숙한 몸놀림. 예사롭지 않다.
아이들 몸은 만성피로란 게 없다. 망아지처럼 뛰놀아도 지칠 줄 모른다. 몸이 생기로 가득 차서 이제 막 땅을 뚫고 나온 새싹처럼 싱싱하고 야무지다. 우주의 모든 기운을 끌어다 쓰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재잘대고 왕왕 뛰어다닌다. 그 같은 넘치는 혈기를 보고 있노라면 나 같은 어른(권태로운 어른)은 위화감을 느낀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우리랑은 체질부터 다른 것이다. 그들과 나를 가르는 높은 장벽. 그 벽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내겐 미운 4살 조카가 있다. 이름은 윤다희. 녀석은 내가 요가하는 꼴을 못 본다.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나를 밀치고 매트를 차지해버린다. 그러곤 내가 결코 한 적 없는 이상한 동작으로 흉내를 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해서 가끔 손으로 거들어주는데 그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흐물흐물. 몸이 흐물거린다. 손의 감촉으로 단박에 느낀다. 굴을 손으로 잡을라치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미끄러질 때가 있는데, (비유가 적절치는 않지만) 정말 그런 느낌이다. 조카의 몸이 엉뚱하게 휘어지거나 하면 그걸 잡고 있던 손에선 서늘한 불안이 찌릿하게 스친다. “아고! 괜찮아?” 놀라 묻는데 조카는 까르르 웃는다. 도깨비에게 놀아난 기분. 꼭 연체동물을 보는 것 같다.
문득 생각한다. 나도 분명 저렇게 흐물흐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있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느 시점부터 변한 것일까? 너무 현저한 차이라 황당할 따름이다. 신은 나를 말랑말랑한 흙으로 빚어 놓으셨는데 나날이 마르고 건조해지더니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얼마 전 정형외과에서 찍은 엑스라이 사진은 정말 충격이었다. 척추가 한눈에 봐도 (완만히) 왼쪽으로 휘어 있었다. 목은 일자목. 제 것인데도 어찌나 동정심이 들던지. 이것이 서른 해를 살아온 몸의 실체구나, 생각했다. 투명한 시간은 그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앞으로 다시 서른 해를 살면 내 몸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 또한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매일의 요가로 조금은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잘못된 자세를 바로잡고 몸의 균형을 이루면서 제대로 늙어가고 싶다. 그래. 그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다. 흰 머리 할머니가 되어도 ‘요가하는 나’였으면 좋겠다. 작은 방에서 홀로 명상하며 크게 쉬고 내쉬고. 크게 쉬고 내쉬고. 그렇게 언제나 전진하면서.
함께 수업을 들은 소녀는 역시나 잘했다. 어른들은 낑낑대며 하는 동작을 힘든 기색 없이 척척해냈다. (조금은 얄미울 정도로 손쉽게) 둥글게 말리고 망설임 없이 찢어졌다. 수련을 계속하면 고난도 자세도 무리 없이 해낼 것이다. 부럽다. 부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부질없으니 되도록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열심히 내 것에 기름칠이나 하자.' 그런 마음으로 수업을 마쳤다. 다음에 소녀가 또 오거든 그땐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