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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ug 03. 2021

걱정할 것을 미리 걱정하는 나에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지 못할 때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시뮬레이션을 멈추고 싶을 때   


 

 학창 시절 나는 '게으른 천재' 코스프레를 곧잘 하는 아이였다. 이를테면 학교 수업 시간에 전혀 집중하지 않으며 딴짓을 하는 식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줄곧 엎드려 자거나 게으른 나를 한껏 티 냈다 (물론 코스프레로 그치지 않고 실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평소에 게으른 천재 연기를 하다, 시험 전날 내가 가진 성실함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마다 벼락치기를 하며 밤을 새웠다. 어쩌다 성적이 잘 나올 때면, '공부 안 하고 맨날 잠만 자더니, 어떻게 시험을 잘 봤냐'고 친구들이 나에게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는 장면. 나를 둘러싼 이야기를 이런 장면들로 채우고 싶었다.


 되돌아보면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성적이 엉망으로 나올 때를 대비한 보호막. '성실'과 '열심'이라는 무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결과가 안 좋아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성과 없이 성실하기만 한 이미지'로 낙인찍히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쟤는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결과가 좋지 않네” 식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이미지로 비춰야 실패했을 때 덜 아프고, 덜 불쌍해 보일 거라는 착각을 했던 듯싶다.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게 싫고 두려웠다. 가끔 두터운 보호막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게으른 천재'가 아니라 그냥 '불성실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


 머릿속으로 앞날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던 나였다. 특히 미래의 ‘실패’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자주 돌렸다. 상상력은 뛰어났는데 그 상상력은 주로 비관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험을 앞둔 날이면 곧 엉망인 성적표를 받아 들며 실망하는 나를 상상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 전에는 실패해서 울고 있을 미래의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고는 했다.


 나쁜 미래에 대한 공상은 현실이 될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걱정이 너무 많아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그걸 미리 걱정한 적도 있었다. 머릿속이 터질 듯 생각이 폭주하는데도 불구하고 걱정을 계속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미리 최악의 상황에 대해 걱정을 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해두면 예방주사를 맞은 듯 내심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비관적으로 앞을 보아야 후일 나에 대한 실망이 줄어들 것 같았다. 그러나 상상은 단순히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때때로 비관, 슬픔, 무기력으로 이어졌다.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가동하다 잠 못 이룬 날도 많았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비관적인 생각은 잔가지를 뻗치며 머릿속을 차지했다. 실패에 대한 걱정 때문에 어떤 일이든 도전하고 싶지 않은 날도 늘었다.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은, 걱정이란 장애물 앞에서 번번이 막혔다.



형태의 단순함을 추구하다, 피트 몬드리안



 피트 몬드리안(1872~1944. Pieter Cornelis (Piet) Mondrian)은 187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외삼촌 밑에서 그림을 배우며 일찍이 화가를 꿈꾸던 청년이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교육학을 전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뜻을 꺾지 않고 미술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긴다.

 

피트 몬드리안의 자화상(1900)

 그의 초기작들은 당시의 흐름에 따른 자연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세계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보여주는 것, 몬드리안은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의 신념은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로 이어진다.


 1910년 파리에서 입체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본 몬드리안은 점차 그림의 형식과 구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후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현실의 외적인 형태를 지우고 기본적 요소에 집중하자는 순수 추상 운동(데 스틸 De stijil)에 활발히 참여한다. 본질을 드러내는 예술 방식에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의 네 작품을 비교해 보면 몬드리안의 예술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08년에 그린 <붉은 나무>의 경우 나무의 복잡한 잔가지까지 형태를 모두 그려냈다. 나무 역시 붉은색으로 표현했다. 1911년에 그린 <회색 나무>는 전작에 비해 훨씬 단순해진 모습이다. 나무의 잔가지는 줄어들었고 색채도 검정과 회색이라는 무채색으로 바뀐다. 

<붉은 나무>(1908, 좌)와 <회색 나무>(1911, 우)



1912년에 그린 <꽃피는 사과나무>는 나무의 형태 자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화면이 곡선으로 가득 차 있다. 1930년으로 시간을 건너뛰어 보자.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이라는 단순한 제목의 작품이 눈에 띈다. 이 작품에서는 몬드리안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직과 수평의 검은 선. 선으로 나뉘어 있는 영역은 빨강, 파랑, 노랑과 하양만으로 채워져 있다. 몬드리안은 서 있는 나무에서 수직의 이미지를, 평온한 바다의 흐름에서 수평의 이미지를 얻었다.

 

<꽃피는 사과나무>(1912, 좌)와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1930, 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낸 뒤 그는 수직과 수평의 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검은색만으로 그림을 표현했다. 명확하고 심플한 그림의 세계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그림 세계를 신조형주의라 일컬었다. 신조형주의의 기하학적 표현은 불필요한 외형 묘사를 없애고 기본적인 형태와 본질, 순수한 회화의 공간에 천착하던 몬드리안의 예술적 이상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걱정의 복잡한 잔가지를 쳐낼 때



 형태와 색의 단순화를 추구한 몬드리안의 작품 세계는 20세기의 공예, 조각, 건축, 패션 다양한 예술 분야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단순히 차가운 기하학적 평면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외형을 단순화하며 드러나는 순수한 본질, 기본적 형태에 대해 고민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몬드리안의 다양한 작품 속에서 나무의 형태가 사라지고 기하학적 선과 평면의 형태만 남는 과정을 살펴보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본질'과 '기본'을 추구하다 보면 많은 것들이 단순해지며, 핵심적이고 순수한 것들만 남게 된다.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걱정의 시뮬레이션, 그것의 복잡한 형태를 생각해보았다. 이 시뮬레이션은 복잡한 사슬의 형태를 띤 채 생각의 잔가지를 쳐나갔다. 새로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그래서 내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되면, 실망해서 도저히 다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면,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실패한 사람으로 쳐다 본다면, 앞으로 고꾸라졌는데 다음 시도마저 실패하게 되면.... 생각의 가지는 끝도 없이 뻗어나갔고, 모든 것이 복잡해졌으며 그만큼 불면의 밤도 늘었다. 걱정을 많이 한 만큼 머리는 빠르게  움직였지만 몸을 움직이기는 어려워졌다.


 복잡한 걱정의 외형 안에 얽혀 살던 내가 바뀐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나는 눈에 띄게 성실해졌다.  


 최근 몇 년간 인생은 예상치 못한 흐름과 결과를 나에게 안겨 주었다. 갑작스럽게 중동에서 삶을 꾸리게 되었고, 예상치 못한 글을 쓰게 되었으며, 1년 6개월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삶도 계속되었다. 때때로 그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당장 내일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 걱정과 불안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나 삶의 불규칙한 흐름을 알게 되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인생의 모호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복잡한 걱정의 형태는 사라지고,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의 선택지는 단 두 갈래로 줄어들었다. (어차피 마음대로 안 될 미래를 비관하며)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지는 방안 내가 바꿀 수 있는 오늘에 집중하는 방안. 두 갈래 중 허무주의를 택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긴 인생을 끌어가기 힘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오늘 하루의 성실한 일상을 사는 것에 대해 집중하게 되었다.  하루치만큼 성실해지기로 결심하자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약간 줄어들었다.


이동진 작가의 이 말이 가장 적확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최근의 나에게 가장 큰 걱정과 불안을 안기는 일은 매주 브런치에 글 하나를 발행하는 행위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글을 발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월요일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내 어두운 글을 읽고 마음이 무거워져 얼굴을 찌푸릴 독자를 상상할 때도 있다. 걱정은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글을 발행해 독자수가 줄어드는 경험을 하느니, 차라리 몇 달간 글을 올리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럴 때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생각을 쳐내는 질문을 던져 본다. 읽는 이의 반응, 그건 내가 예측하고 걱정하면 마음대로 되는 영역인가 질문해본다. NO라는 답이 돌아온다. 다음 질문도 던져 본다. 현재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지금의 내 행동'이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답이 돌아온다. 매주 월요일 아침부터 화요일 저녁까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 하나를 써내는 것. 생각해보니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고, 그래서 그 행위를 매주 하게 되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머릿속에 비관적인 시뮬레이션이 24시간 돌아가는 순간. 그런 순간을 의지만으로 조절하기는 힘들다. 심지어 내 마음조차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우리의 뜻대로 관리하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늘의 작은 내 행동뿐일지도 모른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달리거나 산책을 하는 것. 청소나 설거지를 하는 것.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걱정과 두려움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면 몸을 먼저 움직여본다. 행동을 먼저 해야 의지가 따라올 때도 있으니까.


성실은 아름다운 것이고 불성실이 해로운 것이라 단정 짓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나는 몸보다 머리가 빠르게 움직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단순 명쾌함은 여전히 내가 가진 덕목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복잡한 머릿속에서 걱정과 공상의 잔가지를 쳐낸다. 나는 지금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내가 걱정을 거듭하며, 걱정 뒤로 숨어 피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걱정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해 보기도 한다. 그러면 복잡하게 얽혀 있던 두려움과 불안이 조금씩 사라진다. 걱정과 불안으로 얽힌 복잡한 생각을 단순화시키고 난 후, 결심해본다. 오늘 하루치 만큼만 성실해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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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어스 사이트 브런치 대상 작가 기획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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