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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pr 19. 2022

행복의 분석

인생 속 행복한 날을 재현할 수 있을까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의 기억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 당신의 인생 속에도 그런 날이 존재했나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 어떤 책에서 이런 질문을 마주했다. 당시에는 이 짧은 질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누군가 현재의 내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떠오르는 하루가 있다


9년 전쯤의 겨울, 봄 방학 기간 중의 하루였다.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10시간 넘게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날의 나는 다음 학기 수업에 쓸 학습용 프린트를 70~80페이지가량 만드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장 급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날은 유독 책상 앞에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 있는 상태였다. 내키는 때에 밥을 차려 먹고, 과자를 우걱우걱 씹어대며 하루를 보냈다. 의자에 기댔다 허리를 펼쳤다 자세를 바꾸며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렸다. 일을 끝마친 후, 느지막한 저녁에 집을 나섰다. 같은 부서가 된 이들과 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식 장소인 고깃집으로 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하루를 마감했다.    


 되돌아보니 지극히 평범한 날이다. 특별한 이벤트도 부재했고 굉장한 장소로 여행을 간 것도 아닌 날. 인생의 엄청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닌, 인생에서 언제든 스쳐갈 수 있는 하루였다. 별 것 없는 날이란 걸 알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이 자주 그리웠다. 젊고 명랑했던 과거로 돌아가고픈 마음일까? 느지막이 외출하던 기분을 재현하고 싶은 걸까? 고기와 맥주와 대화가 오가던 시간이 그리운 걸 수도. 아니, 생각해보니 난 회식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던 사람도 아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날을 떠올리면 묘한 향수가 피어오른다. 


 지금의 나에게는 다른 형태의 행복이 펼쳐져 있고, 앞으로 더 즐거운 날이 많을 거라 자부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 한 켠에 자리해 있다. 별다르지 않았으나 완벽했던 그런 날이 다시 내게 올까? 모든 것이 조금씩 시큰둥하게 느껴지는 지금, 다시 그런 날을 재현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과학적 탐구로 빛을 캔버스에 나타내다, 조르주 쇠라



 신인상주의라는 예술적 흐름을 펼쳐낸 인물,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 1859~1891). 법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파리 부유층 집안 출신의 어머니 아래에서 풍족함을 누리며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반대 없이 순조롭게 미술 공부를 계속한 인물이기도 했다. 1878년 파리의 명문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 미술교육을 받았으며, 파리에 자신의 작업실을 꾸려 초기에는 흑백화를 주로 그렸다. 


조르주 쇠라의 초상화 


 예술 활동을 하던 중 인상파 화가 폴 시냐크(Paul Victor Jules Signac)와 교류하면서 큰 영향을 받는다. 당시 인상파는 어느 정도 역사를 쌓아오며 그 길을 확고히 해온 화풍이었다. 쇠라와 시냑은 인상파의 새로운 모습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두 화가는 그 새로움을 과학적 탐구를 통해 찾아낸다. 

 

쇠라의 시도는 새로운 것이었다. 당시까지 대부분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을 묘사하길 원했다. 그들은 빠르게 붓을 움직여 빛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을 표현했다. 짧은 붓질로 색을 겹쳐 칠해 빛을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여러 물감이 섞인 채 시간이 지나면 화면은 칙칙하고 탁하게 변한다. 뿐만 아니라 사물의 형태가 구체적이지 않고 일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 인상주의 화풍을 연 대표적인 작품이다. 


쇠라는 빛을 다르게 이해했다. 그는 작은 입자가 모여 빛이 만들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작은 입자로 나뉜 빛을 캔버스에 표현하는 게 쇠라의 방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쇠라는 물감의 색깔을 섞지 않고 원색만 사용해 점으로 찍었다. 작은 점의 색점을 여러 개 찍은 상태이기에 원색 특유의 밝고 산뜻한 기운이 캔버스를 채우는 식이었다. 


  쇠라는 서로 보색 관계인 다양한 색채의 점을 많이 찍어 형태를 나타냈다. 색채를 섞어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결국 이것은 관람자의 머릿속에서 색이 혼합되며 하나의 색채로 보이게 된다.  



분첩을 가지고 화장하는 여인(1889~1890) 


아스니에르의 물놀이(1884) 


기묘한 묘자(1889~1890)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를 살펴보자. 쇠라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며 젊은 화가의 의지와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


  다양한 계층의 파리지앵들이 센강 안에 있던 휴양지 그랑드 자트 섬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중산층들이 경제적 여유를 찾아가고, 삶의 질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40여 명의 인물은 제각기 파리의 여유를 누리고 있다. 


 파리의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도 있다. 가령 그림의 오른쪽 높게 부풀린 치마를 입고 있는 여성은 애완용 원숭이(음란함을 상징한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춘부이거나 상류층의 정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보면서 관람객은 그림 속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작품 속 인물들이 얼어붙은 듯 정지되어 대다수 한 곳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사람과 사물이 균형 잡힌 구도로 배치되어 있는 것도 정지감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이유다. 쇠라는 화면에 입체감 없는 사람들을 늘어놓고 크고 작은 직사각형으로 구성된 화면에 황금 비율을 적용하려고 했다. 덕분에 그의 그림 속에서 인물들은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중간의 두 모녀를 제외한 대다수 인물들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이집트 벽화 속 인물들이 시선을 한 방향으로 하고 운동감 없이 서있는 모양새와 유사하다. 

    

 쇠라는 2 × 3m의 이 거대한 작품에 원색만을 사용해 하나씩 점을 찍으며 그림을 완성했다. 작품 제작에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그는 작품에 넣을 만한 모습들을 다양하게 습작했는데 그 숫자만 해도 60여 점이 될 정도였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습작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 화가는 색채학과 광학 이론을 연구하며, 색을 분할하고, 대비시키며 신인상주의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행복의 요소를 분석하다     


 

쇠라는 원색을 섞지 않고 작은 점과 입자로 빛을 구성해 작품을 완성했다. 과학적으로 색을 해체하고 분석하며 연구하는 것. 이 화가가 대상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아니었을까. 


 나는 늘 행복을 잡기 어려운 하나의 커다란 뭉치라고 생각했다. 이미 지나가버린 행복의 날을 떠올리면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의 장소, 들떴던 기분, 기분 좋은 상황을 그리워하며 진한 향수로 회상을 마무리했다. 그럴수록 행복은 다시는 가닿기 어려운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행복을 작은 입자로 ‘분석’하는 방법도 있었다.  완벽한 행복의 날에 존재하는 잔상을 거두어내고, 복잡다단하게 섞인 기분과 상황을 단순화시키면 행복의 작은 입자를 찾을 수 있었다. 


 가령 9년 전 봄방학을 떠올려보며 나는 행복의 몇 가지 요소를 건져냈다. 먼저 그날의 나는 10시간 이상 집중하여 어떤 일을 부여잡고 있을 때 희열을 느꼈다. 이것이 나에게 맞는 행복의 제1 요소라 할 수 있다. 일을 마치며 느꼈던 뿌듯한 기운행복의 제2요소였다. 일을 마친 후 개운한 마음으로 술을 들이켜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휴식하는 경험, 이것이 내 행복의 제3 요소라 할 수 있다. 


주어진 과업을 집중하여 마치고 개운한 기분으로 쉬는 것. 내가 해낸 하루의 작은 승리를 뿌듯해하며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하는 것. 행복의 작은 입자들을 분석해보고 나니, 작은 점을 찍듯 일상에 이 요소를 뿌려 넣는 것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낮 동안은 집중하며 희열을 느낄만한 일을 찾아 집중한다.  그날 정해놓은 과업의 마침표를 찍으며 뿌듯함을 느낀다. 밤에는 맥주를 마시거나 수다를 떨며 작은 휴식을 나에게 선사한다. 아주 작은 입자들을 일상에 더하면 행복도 그리 먼 것이 아닐 수 있었다. 


우리는 행복에 추상적이고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함부로 분석하거나 작은 단위로 쪼개어 생각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과도하게 의미 부여를 할수록 행복은 먼 곳으로 달아나기 쉽다. 타인의 행복을 엿보면서 더 불행한 내가 될 가능성도 높다. 과거의 완벽한 행복을 재현할 수 없다는 아련한 느낌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져들기도 쉽다. 


차라리 나에게 찾아왔던 행복의 세세한 입자를 쪼개어보고 이 요소를 삶에 더해주는 게 더 쉬운 일 아닐까. 행복의 요소를 찾아내고, 그 요소를 삶에 점 찍듯 넣어주면 될 일이었다. 분석해보니 행복은 가닿기 어려운 파랑새가 아니라, 작은 입자와 알갱이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 주까지는 원래대로 화요일 저녁에 글을 발행하고, 5월부터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달에 2회만 이 매거진에 글을 실을까 합니다.


 매주 연재를 하기 위해서 2년 가까이 노력했는데, 이제 조금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아요.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을 바탕으로 새로운 책 작업을 들어가야 하기도 하고, 현재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거나 출간 계약을 마친 청소년 교양서 원고 작업도 있어서, 지금 계획하기로는 내년 초까지는 책쓰는 일을 쭉 이어가야 할 것 같아요. 


참으로 감사할 만한 일이고 운이 좋은 일이지만 물리적 시간의 한계가 있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어려운 사정이라 어쩔 수 없이 브런치 연재를 한 달에 2회 정도로 조정해야 될 듯싶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려요. 늦은 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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