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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May 19. 2024

민원실에 나타난 프랑스 국민배우

그는 한 달 전부터 내가 일하는 민원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동그랗게 생긴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에는 숏비니처럼 생긴 검은색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초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은색 모직 외투를 입고 있었다. 외투는 너무 낡아 소매가 헤어져 있었고, 외투에 붙어 있던 단추는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남은 단추 한 개가 겨우 외투에 매달려 있었다. 외투는 누군가 입던 것을 주워서 입은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장이 너무 길어 외투 끝자락이 바닥에 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손으로는 길이 50cm 정도의 이름 모를 식물이 심어져 있는 화분을 들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서류 뭉치가 가득 들어 있는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중에야 종이가방에 들어있는 서류뭉치가 고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발은 낡은 군화였다. 군화는 너무 오래 닦지 않아 윤기가 없었고 표피가 군데군데 벗겨져 누렇게 얼룩덜룩한 모습이었다. 화분을 들고 있는 손에는 반장갑을 끼고 있었다. 바닥이 고무로 된 목장갑 끝을 잘라 반장갑으로 만든 것이었다.  


나는 희한한 복장을 한 그의 모습에 "어디서 봤지?" "어디서 봤는데.... 낯이 익은 복장인데...."를 되뇌다가 무릎을 '탁'하고 쳤다. 나는 제법 장난기가 많은 편이라 하마터면 "마틸다는 어디에 있어요? 차에 있나"라고 할 뻔했다. 가슴에 한을 품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 검찰청 민원실이라 생뚱맞은 그의 복장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민원창구에 앉아 책상으로 머리를 떨구고 일하고 있는 나를 무심히 쳐다보더니 묻지도 않은 질문에 혼자 답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다음 방문에서는 내게 질문만을 던지고 갔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외침에 가까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맞습니까?"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데...... 죽여야 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데요?"


그는 선문답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고는 내가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이렇게 신경전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고소장 접수하려고 합니다"


그동안의 행태로 보아 그가 사람의 말귀를 못 알아듣고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제법 또렷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정상인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다.


"예 접수하세요 이리 주시면 됩니다"


그는 오른쪽 손에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열어 고소장을 꺼냈다. 두께로 보아 거의 400페이지에 가까운 양이었다.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있는 양식을 사용하여 제법 고소장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고소를 당한 사람은 장관을 비롯하여 고위직 관료들이었다. 나는 서류를 넘기며 고소장에 적힌 내용을 보았다. 예감대로 요지가 없이 내게 던진 선문답과 비슷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혼자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종이에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고소장이 제법 두꺼운데요. 이런 간인이 빠져있네요 간인을 하셔야 해요"

"그게 뭔데요?"

"아 잘 모르시는구나 누군가 한 장을 빼고 다른 것을 끼워 넣으면 안 되잖아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간인은 앞장을 반으로 접은 후 뒷장의 앞면과 걸치게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고소장이 여러 장으로 구성될 경우 하나의 문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간인하는 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간혹 자신이 제출한 고소장에서 서류가 빠져있다고, 고소장이 조작되었다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있어 항상 간인을 요청한다.


"이렇게 하시면 돼요 간인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제법 양이 많아요 다리 아프실 텐데 이리 들어와 앉아서 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내가 내준 자리에 앉아 그는 400페이지가 넘는 고소장에 간인을 하기 시작했다. 민원실 안은 초여름이라 더웠다. 게다가 겨울외투를 입고 있었으니.....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간인을 했다. 두 세장 되는 고소장에 간인을 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400여 장의 고소장에 간인을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와 이거 되게 힘드네 아우 힘들어"

"뭘 힘들어요 이거 모두 읽고 조사하는 검사님과 수사관님도 계시는데 고소장 내면서 이 정도는 해주셔야지요. 검사님과 수사관님은 지금 고소장에 적힌 사람들 불러서 조사도 해야 합니다. 계속 찍으세요"


그는 도장을 찍다가 지쳤는지 집에서 찍어서 가지고 오겠다며 고소장을 들고 돌아갔다. 다음날 그는 간인을 찍은 두꺼운 고소장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런 기록이 하나도 묶이지 않았네 여기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서 끈으로 묶으세요 끈은 여기 있습니다"

"그것도 해야 해요?"

"이거 수사를 하려면 수사관님도 보고 검사님도 보고 나중에는 판사님도 보게 될 건데 이렇게 다니다가 중간에 있는 서류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렇기는 하네요"


그는 송곳을 가지고 400여 장의 고소장에 구멍을 뚫기 시작하였다. 이 마저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한두 장을 송곳으로 뚫는 것은 쉽다. 하지만 400여 장을 송곳으로 뚫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완성이 된 고소장을 접수하고 돌아갔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다시 400쪽에 달하는 고소장을 들고 민원실에 나타났다. 고소장을 접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소장을 검토했다. 몇 달 전에 제출한 고소장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복사를 해서 다시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를 내 옆자리에 앉혔다.


"선생님이 아시는 대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맞아요.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하는 모든 일은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저는 공무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선생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나서 최선을 다해서 선생님을 도와드리는 사람이 맞아요. 하지만, 똑같은 고소장을 복사해서 계속 접수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피해를 봅니다. 뒤에 또 다른 민원인이 있고 저분들도 제가 도와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낭비되는 것이 저분들에게는 피해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는 것은 맞지만 모든 것을 해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고소장을 접수할까요?"

"죄송합니다"


그는 제출하려고 했던 고소장을 들고나가서 다시는 민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민원인의 괴롭힘으로 자살을 선택한 공무원에 대한 기사와 민원인이 칼을 들고 청사에 난입하여 공무원을 헤쳤다는 기사를 볼 때면 ''레옹'은 그래도 내게 신사적인 민원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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