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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Jul 08. 2024

고통스런 삶의 무게는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수사관이 되어 3-4년이 지났을 때, 민원실에서 민원인들을 상대하는 업무를 한 적 있다. 그때 응대했던 민원인들은 인간군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했다. 이상한 사람, 정상적인 사람, 이상해 보이는 데 정상적인 사람, 정상적으로 보이는 데 이상한 사람.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다.


그 속에서도 기억에 오래 남는 민원인이 몇 명 있다. 이미숙 씨(가명)도 그중 하나다. 민원실에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내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전임자는 이미숙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툭하면 민원 응대자를 처벌해 달라는 진정을 내고, 민원 담당 공무원을 수시로 고소하는 여자를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미숙 씨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민원실에 돌던 그녀에 관한 괴담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저에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내가 이미숙 씨를 처음 만난 그날의 민원실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숙 씨의 아들은 군대에서 사망했다. 보통의 유가족은 망연자실한 채 서럽게 눈물만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숙 씨는 달랐다. 혈혈단신으로 아들이 근무했던 부대를 상대로 싸웠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2018.9월 설립)가 존재하지 않던 2000년 초반 혼자 소송을 감당한 것이다.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아들이 폭행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 전을 진행했고, 승리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진실을 밝혀낸 여전사 같은 그녀는 자신의 블로그에 억울한 사람을 돕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사람을 도왔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돕는 과정에서 검찰청 민원실에서 사건 자료를 자주 열람하고 등사했다. 민원실 근무자들이 이미숙이라는 여자의 존재를 불편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것도 그쯤부터이다.


이미숙 씨는 민원을 요청할 때 항상 녹취를 하고, 조금만 잘못해도 진정을 내며 담당 공무원을 고소한다는 이야기를 전임자로부터 들었다. 그녀를 만나게 될 순간이 도대체 언제일지 잔뜩 긴장한 채 업무를 이어가던 어느 날, 마침내 그녀가 나타났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모습에 잘못 걸리면 죽을 것이라는 전임자의 말이 실감되는 첫인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예상한 것보다 매우 유순했다. 요구하는 내용도 다른 민원인들보다 정확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함께 방문하는 사건 관계인이 요청한 기록은 워낙 두꺼워 그것을 다 등사하기 위해서는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리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철야를 이어갔다.


끝없이 이어지던 야근 도중, 누군가 내게 야식이라며 민원접수대 위에 족발을 내밀었다. 이미숙 씨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영란법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야근하는 우리에게 박카스 등을 건네는 민원인도 많았다. 그런데 악행을 일삼는다는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자, 내 안에 세워져 있던 마음의 벽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이미숙 씨에 관한 괴담이 낭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민원실 야근 근무자들은 이미숙 씨가 사다 준 음식을 피했다. 족발을 먹는 나를 조금 딱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민원실 업무를 담당하던 동안 이미숙 씨와 자주 대면했다. 그녀는 명확하게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구분했다. 규정을 찾아 설명해 주면 이해하고 넘어갔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진정을 당하거나 고소를 당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녀가 민원실의 진상이 된 걸까.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런 의문 속에서 검사실로 근무지가 바뀌었고 몇 해가 지났다.


하루는 민원실에서 근무할 때 함께 이미숙 씨를 상대하던 실무관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나를 찾았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전했다.


“계장님. 이미숙 씨가 자살을 했어요. 알고 계세요?”


이미숙. 내가 그 이름을 어떻게 모른단 말인가. 그런데 자살이라니. 그녀의 이름 뒤에 이어진,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변사사건 담당 수사관을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 이미숙 씨의 변사 사건 기록을 살폈다. 그녀 홀로 자살한 것도 아니었고, 남편과 아이까지 함께 죽었다는 내용 앞에서 또 한 번 마음이 먹먹해졌다. 기록을 덮은 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민원실로 들어오던 그녀의 결의 가득한 표정을 떠올려보았다. 집단자살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픔을 숨기고 있던 것일까.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자신의 고통 위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누적시키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늘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전혀 강하지 않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가면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녀가 도왔던 사건 대부분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었다. 일이 마음처럼 진행되지 않을 때마다 느꼈을 절망감이 그녀를 빠르게 잠식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고통을 참회하듯 떠안고 살지 않았다면 그녀는 살아 있었을까. 변사 사건 기록을 살피는 내내 이런 질문이 이어졌다.  


고통은 우리를 좌절하게 한다. 때로는 그것을 원동력 삼아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떨치기 어려운 고통이라도, 가능한 한 빨리 마음에서 내려놓고 흘려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누며 함께 행복을 도모하는 것도 물론 아름답지만,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현행법과 규정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행복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고통은 우리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기에,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진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찾을 자격이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모두 넋두리에 불과하다. 세상을 떠난 이미숙 씨는 내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듣게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저 그녀의 안녕을 빌뿐이다. 싫은 것은 싫다고 명확하게 말하던, 하루가 멀다고 민원실로 씩씩한 발걸음을 옮기던, 내게 윤기 나는 족발을 건네던 민원실 그 여자. 그녀의 평안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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