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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Jun 30. 2024

호국원에 갈 수 없는 6.25 참전용사

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였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전쟁이야기는 놀라웠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산비탈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인민군을 향하여 M1소총 사격을 하면 탄을 맞은 인민군이 4-5미터 뒤로 날려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안방 다락에는 아버지가 받은 훈장도 여러 개가 있었다. 아버지가 참전용사라서 받은 혜택은 없다. 아버지가 보훈대상자로 지정이 된 것도 아니어서 나는 수사관이 되는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아니면 밥벌이를 위해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진료를 하셨다. 정식적인 방법으로 의사가 되신 것은 아니었고, 전쟁 중 스스로 살기 위해, 그리고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배웠던 의술(?)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많은 사람을 치료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진료 행위는 법적으로 무면허 의료업이었다. 전문용어로 보건범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이었다. 수사관인 내가 아버지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 기억을 남기기 위함이다. 내가 검찰수사관이 되기 6개월 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버지가 처벌을 받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살던 동네 공원묘지에 안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방학이 될 때마다 아버지가 계신 강원도 산골 마을로 가서 여름과 겨울을 보냈다. 하루 종일 산과 들을 돌아다니면서 싱싱한 열매와 더덕을 캐 먹으며 지내던 시절이었는데. 그 마을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은 모두 나를 '최의사 아들'로 불렸다.


‘최의사’는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최 의사님 계세요?”


늦은 밤이면 몸이 아픈 마을 사람들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아버지를 찾았다. 때로는 가족이 너무 아프다며 급하게 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잠을 자기 위하여 누워 있다가도 최 의사를 찾는 목소리가 들릴 때면 벌떡 일어나 주사기와 수술 도구를 챙겼다. 아버지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방을 나섰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점점 익숙해지는 풍경이었다.


전쟁에서 수류탄을 맞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그 상처를 끌어안은 채 다른 사람을 도우려 노력하던 아버지의 모습.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밤마실 정도로 여겼던 그 광경은, 시간이 지나 다시 돌이키니 참으로 내게는 숭고한 장면이었다.   


그 숭고함은 아버지가 떠난 후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내 주변에 존재했다. 아버지가 하숙하던 집의 집주인이자 어린 내게 밥을 해주던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은 날이었다. 빈소를 지키던 사람 중 한 명이 나를 보고 '최의사 아들'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최 의사가 살아서 들어오는 줄 알았다"라고 했다.


사실 아버지가 시골 마을에서 의료 행위를 하시던 1970년대에는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보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돈도 돈이었고, 병원 자체가 적었다. 하루에 버스가 한두 대 정도 드나드는 시골에서는 병원에 갈 엄두조차 못 냈다. 


그 탓에 사소한 질병도 치료 시기를 놓쳐 심각한 병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는 곪아 터진 다리를 잘라 고름을 빼고, 항생제를 놓고, 다리를 꿰매며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


또, 큰 병에 걸린 사람들은 공무원 의료보험증을 빌려서 병원에 갔다. 간호사가 확인할 것을 우려해 보험증에 적힌 주민번호를 외워 자신이 의료보험증에 적힌 사람임을 증명하려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과거 어두운 대한민국 현실이었다.


아주머니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검찰청 민원실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민원인 한 명이 자기 아버지를 호국원에 안장하기 위해 판결문을 발급받으러 왔다. 그에게 판결문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나서 문득 나도 아버지를 호국원에 이장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호국원에서 요청하는 모든 절차를 이행하고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버지가 범죄 이력이 있어서 호국원 이장이 불가하다는 것. 게다가 그 범죄 행위가 무면허 의료행위라는 답이었다. 가벼운 범죄라면 가능하겠지만 힘들다는 답변이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 나는 상상도 못 한 답변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가 불법 의료 행위로 치료한 인원이 4만 명에 달한다는 것. 그리고 범죄 수익은 1억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머물던 시골 군민 인구는 4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진료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전화로 소식을 전해준 담당자는 내 난처함을 눈치챘는지 한 가지 방향을 제안했다.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호국원 이장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 절차를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공무원이 번거로울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4만 명 넘는 사람을 진료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불법적인 의료 행위라 할지라도. 그때 아버지에겐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전화를 마쳤다.


"우와 우리 아버지 정말 명의셨네요 의료사고는 내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공정을 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의 본성적인 선행을 외면할 때도 있다. 아버지의 무면허 의료업은 법적으로는 범죄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의료 행위가 낳은 결과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검찰수사관으로서 법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 나이기에 아버지를 호국원에 이장하기 위해 지나온 일련의 경험으로 법의 한계와 인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라는 규범 이면에는 언제나 숨은 선의가 존재한다.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그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다. 돌아가신 후에도 내게 삶의 소중한 교훈을 주는 고마운 분이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별로 기분 좋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말이 나쁘지 않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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