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내가 민원실에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경찰에서 송치되는 사건을 성격에 맞추어 검사에게 배당하던 업무를 마치고 민원실로 배치받았다. 진정, 내사, 고소, 고발 접수를 담당하게 되었다. 민원실 첫 출근 날, 옆자리에서 일하던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김영자(가명)라는 민원인 있는데, 조심해."
그녀는 매일같이 진정서를 들고 오는데 내용은 엉망이고 목소리는 엄청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고 웃었지만, 곧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김영자는 매주 한 번씩은 꼭 진정서를 들고 민원실을 찾아왔다. 그 진정서에 대한 검사의 처분 결과 통지서도 들고 왔다. 그녀는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무대 위의 성악가 같은 모습이었다.
성악가는 몸통이 클수록 큰 소리가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녀를 보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꼈다. 성악가가 무대에서 노래를 할 때처럼, 그녀는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검사의 공람종결에 대한 분풀이를 민원실에서 했다. 문을 발로 차듯 열고 들어와서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릴 때면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민원실장은 헛기침만 했다.
왜 번번이 공람종결 되는지 궁금해서 그녀의 진정서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읽고 나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내미는 진정서는 언제나 빼곡했다. 문장부호 하나 없이 온갖 이야기가 뒤섞여 있었고, 주어가 여러 번 바뀌며 의미가 산만했다. 어떤 진정서는 읽다 보면 귀신이 나온다거나 귀신 때문에 물이 샌다는 황당한 내용이 이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규정상 접수된 진정서는 '진정' 사건번호가 부여되어 검사실로 올라간다. 범죄사실이 없으면 '공람종결'로 처리된다. 범죄사실이 있으면 정식으로 '형제' 사건번호가 부여되어 수사가 시작된다. 김영자의 진정은 대부분 건축물 하자 문제였다. 10년이 넘은 일이라 민사로도 어려운 사안이었다. 그런데 형사로 처벌해 달라고 요구했으니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부지런히 진정서를 들고 왔고, 그 진정서에 대한 처분 결과를 들고 왔다. 때로는 검찰청을 지나다가 아무 서류도 들지 않고 민원실에 들어왔다.
"검사들이 내 글을 읽지 않잖아. 수사를 하지 않잖아. 수사를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수사를 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서 돌아갔다. 솔직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남들에게는 별일 아니지만, 스스로에게는 얼마나 억울하면 저럴까 싶었다.
몇 달간 그녀를 상대하다 보니 나름의 라포가 형성되어 조금 긴 대화가 가능해졌다. 어느 날, 나는 김영자가 가지고 온 진정서를 읽다 말고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님, 정~~~말, 진~~~짜 원하는 게 뭐예요?"
"여기에서 제일 높은 지청장이 직접 저의 진정서를 받아서 읽어보는 거"
반말이었다
"그럼 검사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이, 받으시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되는 거죠?"
"맞아. 그럼 이제 다시는 여기 안 올게"
"알겠습니다. 정말 다시 안 오는 거 맞죠?"
"그렇다니까 다시는 안 올게"
그녀는 지청장이 자신의 진정서를 받는 것만 보면 더는 오지 않겠다고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역할 하나뿐이었다. 나는 지청장실 문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이런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하지만, 당장 그녀가 민원실에 오지 않게 하는 게 최고의 목표였다. 민원실의 평온만을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꺼낼지 망설이다가 결국 노크를 하고 지청장 방에 들어가 상황을 설명했다.
지청장은 웃으면서 "고생 많다"고 말하더니 함께 올라오라고 했다. 김영자는 긴장한 얼굴로 지청장실 앞에 섰다. 나는 김영자가 지청장을 잘 볼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이 열린 상태에서 진정서를 공손하게 지청장에게 전달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청장도 제법 장난끼가 있었던 분 같다. 지청장도 무게를 잡고 "잘 읽어보겠습니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영자는 문밖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뻐서 깡충깡충 뛰었다. 제법 몸무게가 나가는 나이 지긋한 중년 여자가 지청장실 앞에서 뛰는 모습을 보는 건 민망했다. 마침 수갑을 차고 복도를 지나가던 구속피의자가 있었는데 그는 그녀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려오자마자 내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이제 더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나도 웃으며 말했다.
"검사 중 가장 높은 분이 받으셨으니 이제 편하시죠? 아무 걱정하지 말고 사세요."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나도, 민원실 직원 모두 기뻤다. 모든 사람의 표정이 그랬다. 그 뒤로 그녀는 정말 나타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 아내와 동네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김영자를 다시 만났다. 멀리서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넘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커피를 권했다.
나는 순간 망설였다. 혹시 "내가 커피 마시는 걸 볼 때까지 민원실을 다시 찾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래서 "약속이 있다"며 커피만 마시고 가겠다고 했다.
김영자는 그러라고 하며 우리를 바로 옆 건물로 데려갔다. 4층 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맛집이 몰린 골목의 가장 좋은 코너 자리였다. 그녀는 그 건물이 자기 소유라고 했다. 나는 적잖이 놀랐다. 매번 진정서를 들고 오던 사람이 건물주였다니.
그녀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4층까지 올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마자 나는 멈칫했다. 코끝을 찌르는 진한 향 냄새가 확 밀려왔다. 눈앞에 펼쳐진 건 방 한가득 차려진 신당이었다. 거실이 아니라 온통 붉은 천과 금줄로 장식되어 있었고, 정면에는 커다란 불상이, 양옆에는 산신상이 번쩍였다. 부적이 가득했고, 마트 과일 코너 수준으로 과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향로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지청장이 진정서를 받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집착이 이해되었다.
'아, 무당이었구나....'
김영자는 내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믹스커피를 타왔다. 커피는 진했다. 한 번에 들이마셨더니 목이 뜨거웠다. 설탕이 잔뜩 들어 있어 숟가락이 세워질 정도였다.
"오, 진하네요. 아, 잘 마셨습니다."
"수사관님, 정말 감사했어요. 제 소원을 들어주셔서, 지청장님이 받게 해주셔서. 사모님은 내가 못 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순간, 검찰청 민원실에서 그녀가 하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귀신이 붙었다는 말, 집에 마가 꼈다는 주장....나는 속으로 그녀가 믿는 신이 진정서를 제일 높은 분이 읽게 하라는 게시를 내렸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서둘러 신당을 나가려고 아내 옆구리를 쳤다. 밖으로 나오자 아내가 말했다.
"저분, 정말 신기는 있나 봐.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인 걸 알잖아."
나는 김영자 씨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한을 품고 검찰청을 찾아오는 민원인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저 '들어주는 것'에도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The man who knows every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