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남자는 시계나 차에 빠지고,
여자는 가방에 집착한다고들 한다.
샤넬, 셀린느, 보테가 베네타.
진열장 너머로 반짝이는 그것들은, 기능을 넘어선 언어처럼 보인다.
광택과 실루엣, 감촉까지 디자인된 세계.
명품 가방을 든 친구는 말했다.
“가방 하나면 사람이 달라 보여.”
가방 하나가 사람을 바꾼다.
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태그 같은 것.
가격표가 아니라 정체성처럼 작용한다.
꼭 명품이 아니어도,
살다 보면 ‘급이 나뉘는 소비’를 자주 목격한다.
그 시작은 교복이었다.
아이비클럽, 엘리트, 스마트 교복.
누구는 브랜드 교복과 체육복을 입었고,
나는 언니가 입던 보세 옷을 물려받았다.
작고 낡은 로고는
‘진짜’와 ‘그저 그런 것’을 가르는 신호처럼 작동했다.
대학생이 되자,
이번엔 맥북이 기준이 되었다.
그 앞에 앉은 사람들은 유난히 깔끔해 보였고,
나는 중고 노트북의 밝기를 줄인 채 과제를 했다.
화면 탓은 아니었지만, 괜히 창을 작게 띄우게 됐다.
결혼할 때도 그랬다.
웨딩드레스 사진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가격이 붙어 있었다.
“이건 수입이에요, 이건 국산이고요.”
그 말 한 줄에, 하루의 무게가 구획처럼 나뉘었다.
우리는 가장 단출한 드레스를 입고,
꽃 장식도 줄였다.
예식장의 뷔페도 가장 기본 코스로.
결혼식 사진을 보면 늘 같은 장면에서 멈춘다.
어깨 라인이 어딘가 어색하고,
부케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래도 좋다.
그날 우리가 웃었던 건 꾸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스며드는 생각.
‘조금만 더 썼더라면 어땠을까.’
부러움이 아니라, 사회가 내면에 심어놓은 비교 감각이 고개를 든다.
결혼 후에는 내 집 마련 이야기가 이어졌다.
누구는 몇 평짜리 신축에 들어갔고,
누구는 부모님이 보태주셨단다.
대출 없는 전세, 브랜드 아파트, 커튼월 창.
그 모든 단어가
질문이자 자랑이자, 어쩌면 무기였다.
어느 날, 라캉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은 내 안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
타인의 눈길을 따라 피어난다.
SNS엔 호텔 같은 집이 넘쳐난다.
매끈한 싱크대, 간접조명, 고양이가 눕는 통창.
그곳엔 삶이 아니라 ‘연출된 정돈’이 있다.
알면서도, 나는 그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저렇게 살면,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까?’
명품, 집, 웨딩드레스.
그 위에 새겨진 로고는 결국 작은 금속 조각인데,
그 하나로 사람을 판단하고, 삶을 분류하고,
존재감을 규격화한다.
이러다 관뚜껑에도 샤넬 로고가 박히는 건 아닐까.
명품 인생, 명품 죽음.
장례식도 클래스가 나뉘는 시대가 오는건 아닐까.
하지만 가장 오래 남는 건
누군가와 나눈 웃음이나,
비 오는 날 마주 잡은 손의 온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무신사에서 산 5만 원짜리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가죽 손잡이는 손에 익었고,
주머니 안쪽엔 오래전 영화 티켓이 남아 있다.
남편이 그걸 꺼내며 웃던 날이 있었다.
그런 순간이 내 삶을 닮았다.
마트에선 마감할인이 시작할 쯤 도착해서
여전히 가장 늦은 날짜의 두부를 고르고,
할인 스티커 붙은 우유를 집는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일상.
하지만 그 안엔
작고 단단한 기쁨들이 숨어 있다.
세상엔 명품이 너무 많다.
모두를 가질 수는 없지만,
오늘도 나에게 가장 오래 남을 무언가를 고른다.
빛나지 않아도, 닳아도,
그게 진짜 내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