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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Jun 04. 2024

왜곡된 자아

<자기 통찰>을 읽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며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직심리학자 타샤 유리크는 3년 동안 선보인 선구적 연구에서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저서를 출간했다. 우리는 왜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참모습을 알 수 있을까? 자기 성찰을 자기 통찰로 이끌어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인사이트를 가진 자는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극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우리나라 국민의 노력은 상당했다.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과 노동자 개인의 침묵으로 나라가 잘 살게 되는 노력의 시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유대교와 기독교에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통이 만연했고 18세기 미국은 노력과 투지 위에 세워졌다.  


 인간의 최상위 욕구에 자아실현이 있다고 주장한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연구가 시발점이 되면서 노력의 시대가 저물고 어느덧 자존감의 시대가 도래했다. 침묵을 공수하던 개인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자아실현은 매슬로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성취하기 매우 어려운 단계로 대중은 그 하위 단계인 자존감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자존감은 스스로 위대해질 필요 없이 단순히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사회와 국가에 기여하던 국민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간과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나를 제외한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왜곡해서 바라보았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게 된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경탄하듯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린 것. SNS만 들여다봐도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가상의 공간 속 나와 현실의 나는 극심한 차이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지나치게 자기 몰두에 빠져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리라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셀카 증후군은 특정 세대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웹 기반의 검색 엔진 구글 엔그램의 측정 결과 1975년부터 2008년 사이에 '나'라는 단어의 사용이 무려 87퍼센트나 증가했다. 자존감을 중시하는 문화가 심해져 '자기 망상'에 빠져버린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을 왜곡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뭐든 도가 지나치면 건강을 해치는 법.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타인과의 소통이 필수불가결한 사회다. 나를 둘러싼 바깥의 일에 호기심을 가져야 건설적인 내가 될 수 있다. 자기 몰두에서 빠져나와 자기 인식으로 거듭나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자기 통찰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자기 자신을 꿰뚫어 봄으로써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심적 상태를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자기 성찰과 자기 통찰은 엄연히 다른 어휘이며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회고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가진 이들은 자기 이해도가 높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은 어떠한 교집합도 없었다. 


 먹구름 가득했던 우기가 지난 다음 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생각에 골몰해 있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바닥만 보고 걷기 바빴다. 말끔히 차려입은 그는 그만 바로 앞 물웅덩이를 보지 못한 채 광택을 낸 구두와 새로 산 옷을 적시고 만 것이다. 그는 흙탕물을 인식하고 반성하지만 이미 그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우스운 모양이 된 그는 물웅덩이에 흠뻑 젖은 자신을 탓하기도 하며 지난 흙탕물을 회상하지만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간다. 그는 앞으로도 물웅덩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에게는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점을 연결하여 애플을 만들었다는 스티브 잡스처럼 우리는 무수한 별을 만들어 별자리를 그릴 수 있다. 당신의 인생은 타락의 결말인가, 전화위복의 구원의 결말인가. 그 이야기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주위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도 왜곡되는 역설적 결과가 초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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