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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Jun 07. 2024

육아 그 이전의 수단들

23살 치킨집 여사장 이야기

"엄마! 소연이 아빠는 택시 운전하신대. 우리 아빠는 무슨 일을 해?"

"그냥 사업. 누가 물어보거든 사업한다고 해."


 '그냥'이라는 단어는 직업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새파랗게 어렸어도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의 대답에 나의 궁금증이 해소될 리 만무했다. 질문과 궁금증은 해년 거듭되었지만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대답도 덧붙이셨다. "사업은 힘들어. 안정적인 공무원이 최고야." 그렇게 나는 공무원은 좋은 직업이고 사업은 힘든 것이라는 시각이 생겼다.





 대학 시절의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주말 알바였다. 예식 도우미(이하 예도)는 화려한 신랑 신부를 돕는 조연에 불과했을지언정 뾰족구두와 예쁜 유니폼은 제법 폼이 났다. 많게는 한 주에 20건에 해당하는 예식을 진행했으니 거기서 오는 뿌듯함이 상당했다. 주말 약속은 전부 반납하고 예도에 매진했다. 그래봤자 알바지만 '팀장' 자리에 오르니 여러 예식장에서 나를 부르는 '러브콜'이 쇄도했다.


 나는 주로 사회자를 서포트하며 결혼식장의 무대 조명과 음악을 다루는 '스캔'을 맡았다. 긴장한 사회자는 나의 리드에 원활히 결혼식을 진행하게 되니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30분의 아쉬운 예식을 뒤로한 채 사회자가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는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2011년 12월의 어느 날, 유독 뚱뚱하고 웃긴 사회자가 있었다. 예식이 끝난 후 그는 나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실패할 경우의 수를 두고 해당 결혼식장의 계약자인 친구를 이용하여 나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 그렇게 인연이 된 그 남자(이하 G군)와 연애 5년을 채우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





 G군의 부모님은 공무원이셨다. 각각 30년과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철도청과 세무서에서 보내신 후 퇴직하셨으니 친정 엄마의 말마따나 최상의 직업군의 아닐 수 없었다. 그에 반해 G군은 모험심이 많았다. 연애 당시 G군은 대학생인 나를 수단으로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일명 '꿀알바'였던 예도를 그만두고 무모한 '예도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예도에 필요한 유니폼과 나팔 등을 구입하고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명함까지 제작하고 나니 그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구로부터 안산까지 가리지 않고 굳게 닫힌 예약실 문을 열어젖히며 명함을 건넸다. 스무 군데 정도 들렸을까. 드디어 동탄 소재지의 하우스 예식장에서 연락이 왔다. 수지타산은 헤아리지 않은 채 무조건 계약을 했다. 하염없이 발품을 팔다가 예쁜 유니폼을 다시 입을 생각에 마음이 곤두박질쳤다. 몇 건 안 되는 예식이었지만 열정을 쏟았다. 곧이어 안산과 수원의 결혼식장에서도 연락이 오니 주말의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대부분 사업이 그러하듯 예도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존재했다. 결혼식이 많은 봄가을을 제외하고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예식이 없었다. 긴 비수기 동안 인력을 잡아두는 것도 힘들었고 주말이면 30분마다 순진한 신랑에게 낯 두꺼운 영업을 해야 하는 것에 권태감을 느꼈다. 22살의 겨울, 10개월이라는 짧은 첫 경험의 막을 내렸다.


 이번에 G군이 들고 온 아이템은 '카페'였다. 카페라 함은 내가 즐기는 차와 자주 이용하는 공간 아니던가. 그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발품을 팔고 뾰족구두를 신고 뛰어다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주말이면 부동산을 둘러보고 프랜차이즈 사업 설명회를 들으러 다녔다. 이번에는 인천부터 강북까지 이곳저곳을 알아봤다. 그중 광명의 신축 아파트형 공장이 괜찮았다. (2013년 당시 임대료가 462만 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에 홀렸는지 모르겠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이 자리는 치킨을 팔면 대박이 날 것이라고 했다. G군은 같은 '물'이라는 이유로 종목을 '커피'에서 '맥주'로 바꿨고 부족한 돈을 어떻게 마련했다.


 G군은 회사에 다니고 23살에 나는 치킨집 여사장이 되었다. 그 치킨집은 광명의 한 동네를 주름잡는 소위 '대박 치킨집'으로 거듭났다. 적어도 손님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겨울, 16개의 테이블은 꽃 피는 봄이 오면 32번까지 활짝 피어났다. 멀리서도 치킨을 먹으러 손님들이 찾아왔고 단골 주민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치킨을 먹었다. 같은 건물에 상주하는 공장 직원들은 금요일이면 우리 치킨집에서 회식하는 VIP였으니, 자리가 없어서 손님을 돌려보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장사가 잘되니 주변 가게에서는 시샘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게가 시끄럽다는 민원이 끊이질 않았고 유일한 광고였던 가게 앞 유명 연예인의 바람 풍선도 법에 위반된다며 시청 직원들이 가져갔다. 데크에 야장 테이블을 설치하는 것 또한 위법이라며 야장 테이블을 설치하지 못하게 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겨냥해 야장에서 볼 수 있는 TV까지 샀는데 순식간에 야심찬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침체된 광명 상권을 우리가 살려냈는데 이제 와서 시끄럽다고 민원이 끊이질 않으니 모두가 야속하고 미웠다.


 치킨을 먹고 배가 아프다며 위생 검사를 요구하는 손님도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식품위생과에 전화하여 위생 검사를 요구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에 한 번 더 상처를 받았다. "그런 사람들은 계속 물고 늘어져요. 검사도 말고 보험처리도 말고 그냥 현금으로 배상해 주세요." 이럴 때를 대비해 보험까지 들어놨는데 정작 공무원의 입에서 '돈 주고 끝내라'는 말을 들으니 세상이 참 더럽다 느껴졌다. 몇 번의 계도 끝에 납부하는 벌금은 또 액수가 얼마나 큰지 하루치 매출액을 오롯이 가져갔다. 자영업자를 위한 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이 사장이지 자영업자 또한 약자인데, 참 가혹하다 느꼈다.


 더군다나 치킨집 사장이 되기에 나의 성별과 나이는 큰 약점이었다. 나를 무시하거나 큰 소리로 협박하는 중년 남자. 술을 거하게 마시고 내 몸을 더듬는 인간. 장사에 대한 회의감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가해자의 사과도 경찰서 방문도 어린 나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3년의 장사 끝에 권리금 하나 받지 않고 가게를 정리했다.


 남은 것은 마이너스 5천만 원, G군과의 결혼 그리고 뱃속에 잉태한 작은 생명이었다. 엄마의 말은 참말이 틀림없었다. “사업은 힘들어. 안정적인 공무원이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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