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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Essay

어린이는 곧 모두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 서평

by 아리스
아이들은 돌봄, 안전, 및 좋은 양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인격과 개성을 존중받아야 하며 체벌을 포함해 그 어떤 모욕적인 대우도 받으면 안 된다.
_<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 중


시사IN 공채 1기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저자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동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오랫동안 취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며 수많은 기사들을 작성했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은 시사IN에서 보도됐던 기사들을 최신 통계 자료를 참고하여 저자가 새롭게 수정하고 보완했다. 저자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모든 아이들이 밝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저서들만 보더라도 교육 불평등, 아동 인권, 청년 빈곤, 팬데믹 등의 주제를 다루며 그 내면에는 저자의 강한 울림이 스며들어있다.


학대하는 부모, 살아남지 못한 아이

언론의 소음에 귀를 닫고 산지가 5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럼에도, 주변에서는 자극적인 기삿거리가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굳이 언론을 들춰보지 않아도 알게 되는 사건들은 점점 자극적이고 잔인한 형상을 띄고 있는 것 같다. 자극적인 기사들 중 부모가 제 자식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살해하는 이야기는 세상이 너무 암담하게 비친다. 타자가 일을 저질러도 돌팔매질을 맞을 행동을, 사랑만 줘도 부족할 부모가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그저 하늘의 별이 된 아이에게 대신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을 뿐이다. 가해자 부모들의 상당수에게는 큰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창 놀 나이에 책임져야 할 삶의 무게가 버거웠던 것이다. 이 점을 미루어 보아, 제도적으로 사회가 보안해야 할 부분은 명확하다. 현실적인 성교육과 부모 교육이 이른 나이부터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성교육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근 성교육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추상적인 성교육이 아닌, 직관적이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현실적인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성교육은 부모 교육과 병행되어야 한다. 성은 욕구를 분출하는 행위가 아니며, 계획 없는 쾌락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할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일러두어야 할 것이다.


먹어도 먹는 게 아닌 '아동 흙밥'

세 자녀와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레 동네 아이들을 자주 만난다. 거리낌 없이 인사를 주고받으며 간식도 나눠먹는다. 많은 아이들은 내 자녀들과 닮았다. 매일 갈아입는 옷, 깔끔한 외모, 최신식 자전거 등 부모의 부재만 빼면 거의 흡사하다. 부모의 부재 속에서 동네 아이들은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고, 편의점의 컵라면이나 삼각 김밥을 자주 먹는다. 그리고 내가 간식을 가지고 나간 날이면 파리 떼처럼 달라붙는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보며 종종 생각했었다. '지금 먹는 저 컵라면이 끼니는 아니겠지?', '매일 저렇게 먹진 않겠지?', '부모도 알고 있겠지?' 생각에만 그쳤지만 그 많은 아이들 중 일부는 그렇게 끼니를 때우며 밤늦게 퇴근하는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의 삶이 얼마나 바쁘고 치열하면 아이들이 매번 길거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까, 가슴 아프지만 그 이상 개입하는 것은 괜한 참견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2015년 경기도 과천시부터 시행한 무상 급식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학교에 소속된 모든 아이들은 점심 한 끼를 따뜻 한 급식 밥을 먹고 온다. 경제는 저성장 중이지만, 윤택해진 우리네 삶에서 '흙밥'을 먹는 결식아동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 현대에도 결식아동들은 꾸준히 있었으며 현대 결식아동의 문제점은 "돌봄"의 부재였다. 따뜻한 손길로 건네는 따뜻한 밥 대신 엄마 카드로 사 먹는 편의점 음식은 그야말로 끼니를 때우는 행위에 불과하다. 따뜻한 밥상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엄마의 사랑, 포근한 가족의 품,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 그날의 이야기들, 위로와 북적임이 길거리 음식에는 빠져있다. 국가는 성장했지만 점점 치솟는 물가에 팍팍해지는 현실 탓일 것이다.


목숨 건 등굣길

아이들의 교통사고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운전자 입장에서 바라본 일명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아이들을 그 작은 아이들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진짜 '갑툭튀'는 자동차가 아닐까 하고 저자는 문제를 지적한다. 근래에 재정된 “민식이 법”을 두고 대중들은 부모와 아이들을 조롱한다. 도로로 뛰어드는 아이들에게 운전자는 ‘치라니(도로에서 종종 로드킬 당하는 고라니와 초등학생의 합성어)’라는 신조어를 붙이고, 피해 아동의 부모에게는 아이를 내세워 보험금을 받으려고 한다던가, 자녀 교육 좀 잘 시키라고 핀잔을 준다. 피해 가정에게 그런 따가운 말 들은 더 큰 상처를 안겨 줄 것이다. 분명 가정교육도 중요하다. 과거에 비해 현대에는 사회적 시선과 가해자의 안일한 태도 등이 많이 지적되고 있다.

어린이 교통사고만 놓고 보아도 부촌과 빈촌은 극명하게 비교된다. 부촌은 집에서 학교까지 신호등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인도와 도로의 분리가 잘 되어있어 안전했으며 빈촌은 이와 정반대였다. 신호등이 없는 도로 위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으며 골목길에는 주차된 차량과 진입하는 차들 때문에 학교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일반 승용차 범퍼는 어른에게 대개 무릎 높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가슴이나 얼굴 높이다. 어른에 비해 몸속 혈액량도 적은 아이가 돌진하는 자동차 범퍼와 부딪혔을 경우 중증으로 갈 확률은 성인에 비해 상당히 높다. 어린이 교통사고는 예방이 최선이다.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선망의 미래 직업군은 의사, 판사, 선생님 등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요즈음 초등학교 미래의 직업 선호도는 단연 유튜버가 1위다. 아이와 부모와의 콜라보로 최근에는 키즈 유튜버도 많이 등장했으며,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을 벌어들인다. 아이들은 부모가 짜놓은 각본에 따라 연기를 하고, 부모가 편집을 하여 유튜브에 해당 영상을 업로드하면 구독자들은 좋아요를 누르느라 바쁘다. 문제는 '구속'되는 아이의 인권과 '학대'로 비칠 수 있는 각본이다. 키즈 유튜버 특성상 거주지 인근에서 촬영하거나 실생활을 자주 노출하게 된다. 아이들은 원치 않아도 집 주소와 다니는 학교 등이 노출되어 사생활 침해를 받고 있다.

부모는 아이를 울리는 '몰카'를 자주 촬영한다. 아이에게 이상한 음식을 주고 우는 아이를 촬영하며 재미있다고 낄낄댄다. 아이를 놀라게 하고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며 박장대소를 한다. 영상 편집 과정에도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는 장면에 "ㅋㅋㅋ"를 붙여서 업로드를 한다. 구독자들은 울고 있는 아이 영상의 댓글에 "웃기다", "ㅋㅋㅋ", "귀엽다"등의 반응을 남긴다. 영상들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연출된 각본으로 흘러간다.


내 아이들만 키워내기에도 버거운 현실에서 아직도 끼니는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결식아동이 있다는 것과 가장 따뜻해야 할 가정에서 차가운 시선과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려온다. 살기 좋은 나라라고 치부하며 살았는데, 아직도 제도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사항들이 많이 있었으며 저자처럼 꾸준히 외치는 자들이 있어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조금 더 밝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아이라서 봐주기는커녕 아이라서 더 냉정한 세상 속에서 어린이들은 매우 불리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상대를 믿는데 상대는 나를 믿지 않는 게임. 많은 비극들이 거기에서 발생했다. ... 사회는 그들을 일원으로 대해주는 척하지만 사실은 철저히 소외시키고 있었다. 말해봤자 들어주는 이가 없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스스로 제 목소리를 음소거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_<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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