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힘> 서평
지금의 학교 교육은 명령에 따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과 진배없다. 들은 대로 움직이고, 익히고, 옳다고 여기는 결과를 얻는 것에 급급하여 진짜 중요한 호기심, 창조력, 판단력을 스스로 봉쇄해 버리는 수동적인 학생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_다니엘 그린버그
행복의 부재 속에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 답은 역설적이게도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열심히 공부하면 일류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며 고학력 졸업자는 대기업에 입사한다는 공식을 갖고 있다.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은 성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달려왔던 사람들은 그럼에도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토로한다. 저자는 우리가 유년 시절부터 받았던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직은 어리지만 자라나는 세 자녀가 있기에 표면에 드러난 교육의 문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의 학창 시절에도 있었고, 나의 이전 세대에도 있었으며 현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적인 주입식 교육이 바로 그 문제이다. 미국과 유럽이 2-3세기에 걸쳐 이루어낸 근대화를 우리나라는 50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만들어냈다. 압축화된 고성장을 이룬 우리나라는 국가에 이바지하는 인재를 만들어야 했다. 이른바 사회에서 말 잘 듣는 노동자를 만들기에 수동적인 교육은 안성맞춤이었다. 제도적으로 획일화된 공교육은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듯 학생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힌다.
창의력이 왕성했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아이들은 학교라는 사회에 진입함과 동시에 분별력 없는 사고를 갖게 된다. 네모난 학교에는 네모난 교실과 네모난 책상이 있다. 아이들은 네모난 의자에 앉아 네모난 교과서를 보며 교육의 본질은 잊은 채 선생님의 강의를 수동적으로 청강한다. 혹여나 창의력이 풍부한 생각을 내뱉으면 "이상한 애", "특이한 애"라는 낙인이 찍힌다. 아이들은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특별한 생각쯤은 깊숙이 묻어둔다. 졸업을 하고 나면, 그 특별한 생각은 쓸데 없는 생각이 되어 버려진다.
현대 사회는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고학력자들이 길거리에 몰린다. 생각할 줄 모르고 달달 외웠던 암기 내용들만 빼곡한 그들은 당황한다. 생각하는 힘을 버리고, 여태 열심히 암기해 왔는데, 이제 와서 생각을 하라고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장자크 루소부터 루돌프 슈타이너, 미셸 오당, 마리아 몬테소리 등 수많은 학자들은 이전부터 현대 교육과 대비되는 교육의 본질을 주장해 왔다. 교육은 암기도, 지식도, 강의도 결코 아니다. 교육자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유가 있어야 하고, 스스로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학 학자마다 주장하는 바는 세부적으로 다르지만 이와 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아이는 아이답게 놀 줄 알아야 한다. 선행과 조기 교육이 유행처럼 번진 요즈음, 부모들은 알아야 한다. 우리 일생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나이는 고작 유아기뿐이다. 근본적으로 사회적 인식과 제도가 먼저 변화해야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매일 자라나고 있다. 사회구조가 바뀌기 만을 기다리다 우리 아이들은 금방 성인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처럼 주입식 교육을 받으면서 말이다. 우리가 먼저, 부모인 내가 먼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야 한다.
첫 아이가 까막눈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주변 아이들은 이미 빠르면 4-5세에 한글을 익히고 6-7살이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나는 조급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아이를 믿었고, 조기 교육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담임교사는 반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모르는 내 아이를 질타하지 않았으며 아이는 적기 교육을 흥미롭게 이수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면 공교육에서 한글을 배운다. 그러나, 이미 1학년 교실에서는 선행으로 한글을 알고 온 아이들이 태반이었고 선행이 된 아이들은 정기 교육 과정을 지루해하고 있었다. 아이를 믿고 교실에 보내면서 확신이 들었다. 조기 교육은 부모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제도적인 교육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육아 상식과 관행들도 틀린 것 투성이다. 태중에 생명을 잉태한 산모는 의료적 개입을 받으며 아이를 분만한다. 분만한 아이는 부모와 바로 분리되어 신생아실에서 케어된다. 미셸 오당은 출산은 의료 개입이 최소화된 자연스러운 분만 과정이어야 하며 출생 직후 30분은 엄마와 직접적인 접촉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이에게 우유를 마시라고 건넨다. 아이는 우유를 마시는 듯 하나 이내 쏟아붓고 찰방거린다. 여기서 부모라면 대개 "우유를 어서 닦아라"라고 할 것이다. 아이가 우유를 찰방거리는 일에 열중한다면 그것은 "몰입" 교육이고, 그 "몰입"은 교육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우유를 찰방거리며 놀았던 아이를 "찰방 아이"라고 하자. 찰방 아이는 "끌어내는 교육"과 "몰입"을 경험한 아이이며, 맹자의 성선설, 루소의 <에밀>, 융의 <신들의 맹아기>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우유를 닦은 아이를 "닦는 아이"라고 하자. 닦는 아이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주는 교육(주입식 교육)"을 받은 아이이며, 순자의 성악설, 슐처의 <아이의 교육과 지도 시도>, 프로이트의 <초자아>, <무의식>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쏟은 우유를 찰방거리며 놀고 있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는 몇이나 될까. 그것이 정말 좋은 교육이라면 실행해야 마땅한데, 알면서도 실천할 수 있을까 자문한다. 오늘도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내가 한창 "몰입" 중인 녀석들을 방해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해 본다. 물론, 잘못된 행동을 했으면 개선하게끔 도와주는 것은 부모로서 옳은 노릇이다. 그러나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그치기 전에 아이가 무얼 하는지 "그 의도를 관찰하라"일 것이다.
획일화된 공교육은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내가 수십 년 전 받아온 수동적인 교육 방식은 여전히 교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상상력이 풍부했던 아이들은 더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당시 읽고 있었던 여러 교육 서적들 중 발도르프 교육이 가슴에 와닿았다. 발도르프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철학에 따라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발달 특성에 따라 교육한다. 예술과 자연이 있는 발도르프 학교를 찾아 나섰다. 생각보다 국내에는 발도르프 학교가 많이 설립되어 있었으며 그중 몇 군데의 설명회를 다녀왔다. 그곳은 열려있었다. 교과서가 없었고, 아이들은 능동적이었고, 좋은 에너지를 갖고 있었으며, 학교의 건축물 자체도 틀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생각했던 교육은 바로 이런 것이라 여겨졌다.
문제는 현실이었다. 우리의 문제는 검정고시도, 등하교도, 이사도 아니었다. 발도르프학교는 비인가 대안학교로 세 자녀를 보내기에 재정적으로 암담했다. 가슴 아픈 현실에 우리는 무너졌다. 당시에는 많이 속상했지만, 현재 내 교육의 뿌리는 더 깊어졌다. 모두가 맞다고 하는 길에서 나는 내 단단한 뿌리를 지탱하며 아니라고 흔들림 없이 얘기할 것이다. 모두가 선행 교육에 급급할 때 우리는 적기 교육 안에서 흥미를 돋울 것이며 매일 "몰입"하며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다. 학원 가느라 텅 빈 놀이터에서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위한 "살아갈 힘"을 기를 것이다. 아이의 태도를 탓하기 전에 먼저, "의도"를 생각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대자연에서 실컷 놀게 하기"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다.
두 발로 대지를 단단하게 딛고 서서 자신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항상 연마하며 자기 실현을 위해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의지력이 있으며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대자연을 경외하며 전체 중에서 적절하고 조화로운 위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을 즐기는 마음을 갖고, 감수성과 감성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독창력과 결단력이 있으며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하고자 하는 마음 가짐과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적극성과 행동력이 있으며 활력이 넘치고 교섭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살아갈 힘의 정의다.
부모가 되니 정말 "잘" 살아보고 싶다. 고귀한 내 자녀들을 "잘" 키워보고 싶다. 잘 키운 다는 것은 좋은 동네, 맛있는 음식, 좋은 옷과 최신 자전거, 멋진 장난감, 국영수 학원 전부다 아니었다. "너가 이렇게 하면 들어줄게"와 같은 조건부 수용이 아닌 아이 존재 자체를 수용하는 "무조건적 수용"이다. 아이를 훈육하기 전에 "아이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방과후 텅 빈 놀이터에서 무아지경의 상태로 놀아나 집중하는 "몰입"을 경험하게 할 것이고, 공부 대신 대자연에서 실컷 놀릴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 가장 두려운건, 나의 이 강한 신념이 무너지는 것 외에는 없다.
아이들이 스스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 측은 일절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권력, 권위, 공포, 강제, 압력, 질타, 벌은 물론 칭찬이나 상 등의 어떤 평가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_다니엘 그린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