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무렵, 친정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아빠의 걱정 어린 음성에 나는 침착하게 언제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 되물었다. 15분 정도 연락이 안 되었다는 회신에 괜한 걱정은 내려두고 아빠의 안부를 여쭤보려고 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전화가 들어왔으니 전화를 끊으라고 하신다. 아직도 친정 부모님의 사랑은 애틋하구나 싶어서 절로 웃음이 났다. 같이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엄마와 15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시는 아빠와 한결같이 아빠를 챙겨주시는 엄마는 먼 훗날 내가 닮고 싶은 중년 부부의 상(像)이다. 두 분이 무탈하시니 큰 걱정 하나는 없는 셈이랄까. 더없이 감사할 노릇이다.
요새는 아이들에게 책 읽어줄 시간이 부족하다. 가정 보육과 방학의 이점을 크게 느끼는 바다. 독서에 밀물과 썰물이 있다면 학기 중인 지금은 썰물의 파도 중간 지점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은 습관처럼 책을 덥수룩 가져온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읽는 책 한 권은 아이들과 하루 동안 부족했던 교감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잠자리 독서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내일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행위다. 아이들이 피곤한 날은 책 속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엄마의 포근한 음성을 들으며 스르륵 잠이 들기도 한다.
좀 컸다고 스르륵 잠드는 경우가 없는 1호는 동생들이 그렇게 잠든 날이면 큰 환호를 외친다. 마치 아시안게임 금메달 생중계 장면을 본 것처럼. 오늘도 그랬다. 외동 시절로 돌아간 듯 1호는 아기가 되어있다. 제법 커서 안아줄 수도 없고, 안아달라는 말도 잘하지 않는 1호 만을 온전히 바라본다. 아이는 엄마의 손길 한 번에 까르르 웃고, 맑은 얼굴을 보인다. '엄마가 아까 안아줄 때 좋았어', '엄마가 나를 바라보고 잤으면 좋겠어'라는 예쁜 말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동생들이 깨어있을 땐 엄마의 옆 자리를 신사답게 양보해 주고 혼자 훌쩍이며 자거나 덤덤히 자는 날도 종종 있었다. 동생들이 없다고 엄마를 온몸으로 껴안고 잔다. 1호의 죽부인이 된 오늘의 나는 그 사랑을 한 몸에 담아서 벅차올랐다. 아직도 엄마를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느꼈다.
두 살 터울로 아이 세 명이 미취학 시절의 나는 미처 샤워하지 못하는 날도 더러 있었고, 내 시간이라고 책 한 페이지 읽을 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집은 항상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는데, 아이들이 기관에 다니는 요즈음 집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잉여 시간은 많아졌는데 역설적으로 '집안 일 할 시간'은 없어졌다. 오늘도 아이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망설였다. 창고의 묵은 짐들을 정리하면 개운하겠다 싶다가 또 기약 없이 미룬다. 읽은 책을 마무리하려고 근처 카페에 갔다. 카페에 세 시간을 머물렀고, 나는 어제까지 읽은 책을 블로그에 정리해두려고 했다. 세 시간이면 마무리될 줄 알았던 포스팅을 끝내 발행하지 못했다. 머무른 시간 동안 보인 결과가 없어서인지 허망했다. 남들은 본업에 부업까지 해가며 '밥벌이'에 열심인데, 나만 우물가에서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일 한 시간 정도 더 사용하면 포스팅을 발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요새 나는 할 일 없이 책을 읽고, 쓴다. 마치 읽고 쓰는 것에 '미친' 사람 같기도 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이 시점에 마침 책이 잘 읽혀서 <역행자>의 저자처럼 책만 읽고 있다. 남는 게 시간일 때의 자청은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읽은 책은 그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했다. 그의 성장스토리를 곱씹으며 내일 서가에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