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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Dec 11. 2020

아빠의 손을 하마터면 다시는 못 볼 뻔했다.

가족을 위해 일하는 아버지의 노력이 당연한 건 아니다.

“아빠, 손 좀 줘봐.”

“왜~”

“잠깐 손 좀 줘봐. 사진 찍게.”

“아 왜에”

“한번 줘봐 봐.”

“함부로 찍으면 안 돼~이거 비싼 고급 손이야~우리 딸하고 우리 여보 먹여 살린 ~그치이~? 여보~”

“그렇지~우리 여보 손 고급진 손이지~”

“ㅋㅋㅋ 손 줘봐 봐. 사진 찍고 내가 안마해주게.”

“그래 그럼~”


아빠가 장난스레 말했지만, 아빠의 말씀이 맞다. 말 그대로 우리 아빠의 “손”은 나와 우리 엄마, 우리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린 비싼 고급스러운 손이다.

<아빠의 비싸고도 고급스러운 손>

엄마 아빠는 시골에서 냉면 가게를 18년째 하고 계신다.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하루 한두 그릇밖에 못 팔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제 장사하신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다 보니 엄마 아빠가 냉면 장사를 하시는 건 왠지 당연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냉면 가게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될뻔한 적이 있었다.




사실 냉면 가게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계절이다. 여름에는 더워서 냉면이 잘 나가는 편이었지만 아무리 맛있는 냉면이라도 추운 겨울날에는 매출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아빠는 매출을 올리기 위해 조미료 없는 육수도 개발하시고, 면 식감도 더 개선하기 위해 계속 끊임없는 노력을 하셨지만, 이 노력에는 여름에만 빛을 볼뿐, 겨울에는 도저히 빛을 보지 못하였다.


겨울에 장사가 잘 안된다고 해서 세상이 우리 가족을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내 학원비도 내야 했고, 가겟세도 내야 했고, 집세도 내야 했고, 사실 돈이 들어갈 때는 차고 넘쳤기 때문에 뭔가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아빠가 가게를 위해 결정한 건 바로 겨울에는 냉면과 칼국수를 함께 파는 것. 처음엔 냉면이 겨울에는 잘 안 나가는 편이니, 칼국수만 팔까 하는 생각도 하셨지만, 냉면 전문점에서 냉면을 안 파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를 함께 팔기로 하셨다.


냉면만 파실 때는 엄마와 아빠가 항상 같은 공간에서 일하셨지만, 칼국수를 팔기 시작하자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일단 가게가 큰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방 안에는 칼국수 기계를 둘 곳이 없었고, 칼국수와 함께 곁들일 김치도 손수 담그려고 하셨기 때문에 절실하게 더 넓은 공간이 더 필요했다. 다행히 가게 뒤편에 약간의 공터가 있었기 때문에 아빠는 가게 뒤편에 작은 컨테이너를 사서 컨테이너 안에서 칼국수 준비하는 곳을 따로 만드셨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게 비극의 시작 일지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빠는 컨테이너 안에서 칼국수 반죽을 하고 계셨고, 엄마는 주방에서 김치를 담그고 계셨다. 엄마 말씀으로는 그냥 느낌이 안 좋았다고 하셨다. 부모와 자식끼리 뭔가 통하는 게 있듯이 부부끼리도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보다. 김치를 담그고 계시는데 왠지 컨테이너에서 일하고 있는 아빠가 괜찮은지 들여다보고 싶으셨다고 했다.


여자의 직감은 정확하고, 안 좋은 느낌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엄마가 컨테이너 문을 열어보니 아빠는 칼국수 반죽을 하고 계시지 않았다. 반죽 대신, 아빠의 손이 칼국수 기계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아빠의 얼굴은 밀가루 반죽 색깔 버금가게 하얗게 질려버린 채로.


엄마는 사람의 손이 A4용지처럼 납작해질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아셨다고 했다.


“여보!!!!”

“…. 드.. 라이버 좀 빌려와 봐. 옆 가게에서…”

“어.. 어.. 어…”


엄마도 아빠만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옆 가게인 인력사무소로 달려들어 갔다.


"저희 남편 손이 기계에 들어갔는데 누가 좀 도와… 주세요! 드라이버로 기계 분해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인력사무소에는 거의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없었다. 중국인 분들만 계셔서 한국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그중 한국인도 있었는데 일을 기다리는 상태여서 모르는척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중 단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했다.


다행히 인력사무소 일하시는 직원 분이 때마침 안으로 들어오셨고, 엄마는 계속 고장 난 라디오처럼 울먹거리며 같은 말만을 반복하셨다.


"저희 남편 손이 기계에 들어갔어요, 도와.. 주세요…"


그 직원 분은 말을 듣자마자 드라이버를 챙겨서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드라이버를 사용해 아빠의 손을 기계로부터 단숨에 빼냈으면 좋으련만 그분도 종잇장처럼 납작해져 버린 아빠의 손을 보고서는 놀라서 얼어 버리셨다.


다친 사람은 아빠였지만 아빠는 침착하게, ".... 드라.. 이버.. 좀 줘보세요" 하시고는, 자신의 반대 손으로 기계를 분해하여 드디어 손을 꺼내었다.


기계에서 꺼낸 아빠의 손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있었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태로 보였다. 기계 안에 빨려 들어갔을 때는 보이지 않던 피까지 흥건해 있었다. 엄마 아빠는 일단 그 직원 차를 타고 가까이 있는 병원으로 가서 일단 응급처치부터 했다. 하지만 피는 계속 줄줄 흐르고 뼈가 전부다 아작이 나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큰 병원으로 가야 했다.


"사장님, 제가 병원까지 운전해 드릴게요"


하지만, 아빠는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아요. 우리 아내가 대신 운전하면 되니 가서 일 보세요."

"아니에요. 손이 이러신대 빨리 병원 가야죠, 그리고 사모님도 정신없으실 텐데.."

"여보, 그래 빨리 일단 부탁하자."

"아닙니다. 괜찮아요. 당신 빨리 가서 차에 가서 시동 걸어."


사실 이 말을 들었을 땐 도저히 아빠가 이해가 안 갔다. 당시에 엄마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3년 정도 됐지만, 운전은 겨우 10번 남짓 정도밖에 안 하셨을 정도로 장롱 면허 수준이었는데... 하지만 아빠는 그 상황에서도 냉철하셨다. 만약 그 직원이 아빠를 1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병원까지 운전해줄 경우, 인력사무실에 있었던 그 십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운전해줄 사람이 없어 일을 못 나가게 될 것이고, 그분들은 정말 하루 벌어 하루를 사시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생활에 타격이 크리라 판단한 아빠는 차라리 엄마가 운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아니, 여보 내가 운전을 어떻게 해"

"빨리 가서 시동 걸어. 가자"


결국 엄마는 그 작디작은 배달차에 시동을 건 뒤, 아빠를 이끌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그 여정 또한 쉽지 않았다.


운전자들은 초보운전인 차를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알아보는 건지. 엄마가 다른 차들에게 비켜달라고 비상등을 켜고, 부서진 아빠의 손을 보여주면서 급하다고 경적을 울려봐도 다른 차들은 꿈쩍도 안 했다.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가 하고 엄마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셨다.


"여보, 갓길에 차 대, 내가 운전할게"

"당신이 어떻게 해!!!"

"일단 갓길에 차 대. 빨리 바꿔 타."


결국 엄마를 보다 못한 아빠는 엄마와 운전석을 바꾸고 납작 해진 손은 무릎에 올려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붙잡은 채 입술을 꽉 깨물고 병원까지 도착하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병원이었지만, 아빠는 바로 치료받지 못하셨다. 드라마에선 사람이 응급실에 실려 오면 바로 치료받던데.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다. 드라마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실제로는 아빠만큼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도 많고, 심지어 팔이 잘려서 오는 사람, 손가락이 잘린 사람, 등 별별 심각한 사람들이 다 있어서 일단 먼저 접수를 하고 하염없이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무려 1시간도 더 되는 시간을 응급실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셨다고 한다. 엄마 아빠 두 분 다 세상에서 그렇게 긴 1시간은 처음 이셨다고 했다. 3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3분이 지나있고, 1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도 겨우 20분밖에 안 지나있고…


1시간 후에 드디어 수술을 받고, 그 후에 무려 2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아빠는 입원해 계셨고, 2달 반 동안 엄마는 서울에 있는 병원과 가게를 버스를 타고 오가며 아빠의 병간호와 가게 일을 홀로 해내셨다. 다행히 두 달 반 후에는 아빠의 손이 거의 정상적인 손 모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와, 그래도 아버님이 회복이 빠른 편이세요. 술, 담배를 안 하셔서 아마 회복이 빨랐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일단 뼈는 다 붙었는데 신경이 약간…"


약간의 흉터는 남아있지만, 납작해졌던 아빠의 손이 다시 원래 손 모양과 거의 비슷해졌고, 뼈도 붙었지만, 기계가 아빠의 신경을 아작 내버린 탓에 손가락에 감각이 없을 거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손에 감각이 잃어버리신 탓에 젓가락도 자주 떨어트리시고, 새벽부터 일어나 열심히 만든 육수가 들어있는 육수통을 옮기다가 무거워서 실수로 엎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셨지만, 다행히 아빠는 포기하지 않으셨고 옆에서 엄마도 끝까지 도와주셨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아빠는 엄마와 함께 여전히 냉면 가게를 하고 계신다.


그 무거운 육수통의 무게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의 무게도 한없이 무거웠을 텐데..

하지만 그 힘든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 무게를 이겨낸 아빠가, 특히나 아빠의 비싸고 고급스러운 손이 다른 그 어떤 아빠들보다 너무 자랑스럽다.


세상에 당연한 아버지의 노력은 없다. 그래서 절대로 당연하지 않은 아빠의 노력이, 아빠의 사랑이 정말 감사하다.


아빠, 항상 고맙고 너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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