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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Dec 04. 2020

우리 엄마는 안 그런 줄 알았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당장 이번 주에 결혼식을 가야 하는데 옷장을 열어보니 옷은 있지만 입을 게 없었다. 옷이 낡거나 유행이 지나서 입을 옷이 없는 게 아니라 정말 없었다. 원체 꾸미는 것에 관심 있어하는 편이 아니라 화장도 대학원 들어가서야 시작했고, 그나마도 그냥 다크서클 가리는 용도로 했었고, 아직 20대이긴 하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계속 공부만 하다 보니 예쁜 옷에 관심 두기보다는 공부할 때 입기 편한 옷만 사서 그런지 옷장에는 청바지와 후드티만 가득했다.

물론 면접이나 학회 때 항상 입는 바지 정장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내 결혼식이 아니라도 그렇지 그걸 입고 가긴 싫었다.


“엄마, 나 이번에 결혼식 갈 때 입을 옷이 없다 ㅋㅋ”

“그럼 사야지, 이쁜 원피스 하나 사. 그리고 이제 좀 다른 예쁜 것도 사 입고 그래. 엄마 카드 써”


엄마 카드 써.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말로 들릴 수도 있고, 나이도 있는데 엄마 카드나 쓰는 한심한 딸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 돈 쓰는 것에 흥미가 없는 나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물론 흔쾌히 엄마 카드로 옷을 사라는 엄마의 말이 싫다기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컸지만, 원체 물욕이 없는 나는 이번 결혼식 때 입을 옷 말고는 딱히 다른 옷을 살 생각이 들진 않았다. 심지어 지금 회사나 학교도 다니고 있지 않은데 지금 옷을 사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않는 데다가 밖에 나가도 등산이나 운동할 때 나가는데 굳이 옷을 더 살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옷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온라인 쇼핑을 해도 왜 이렇게 다 비싼 옷들인지. 후드티 살 때 4-5만 원이면 살 수 있었는데, 원피스는 별 이쁘지도 않은 게 자신이 꼭 뜀틀 올림픽 선수라도 되는 것처럼 10만 원은 거뜬히 넘으며 “이 정도는 껌이지!”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냐. 하나만 살 거야. ㅋㅋ 하나 사서 겨울에 결혼식 있을 때마다 이것만 입어야지~ ㅋㅋ”

“어휴 왜 그렇게 해. 딸, 이쁜 거 몇 개 더 사 입고 그래. 응? 엄마가 너 돈 너무 많이 쓰면 그때 뭐라고 할 테니깐 일단은 몇 개 더 사 입어.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넌 왜 그러니”


엄마 말이 맞다. 물론 우리 집안이 대기업 집안처럼 돈이 흘러넘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빚더미에 앉아있는 것도 아닌데 엄마 말대로 원피스 몇 벌 산다고 해서 우리 집안 가계(家計)가 휘청일 리는 없을 테니깐.


“아 엄마는 뭐 필요한 거 없어? 내가 또 뭐 시켜줘?”

“엄마는 지금 필요한 거 없지이~”

“옹. 알았옹. 아 맞아. 엄마 로션 다 안 떨어졌어? 저번에 같이 산 거? 나는 그거 다 떨어졌는데. 나 그거 엄마 것도 같이 시킨다?”

“아냐 아냐. 엄마는 괜찮아. 엄마 그냥 집에 있는 로션 쓰고 있어.”

“집에 뭔 로션이 있어? 뭔 소리야?”

“그냥 바디로션 쓰고 있지~엄마는 네가 저번에 사준 거는 비싼데 너무 헤프게 나와서 금방 쓰더라. 엄마는 그냥 그거 안 쓸래”


순간 화가 확 났다. 딸 보고는 언제 입을지도 모르는 10만 원대 원피스 몇 벌 사라면서 그 몇만 원짜리 로션을 자신에게 쓰는 게 아까워서 집에 굴러다니는 로션, 그것도 몸에 바르는 바디로션 (body lotion)을 얼굴에 바른다니.


“엄마, 도대체 왜 그래? 그럼 나도 이거 쓰지 마? 비싸니깐 쓰지 마? 그냥 얼굴 푸석푸석하게 다녀?”

“아휴. 왜 화를 내. 너는 그런 거 써도 되지. 아가씨니깐. 엄마는 아줌마인데 뭘 그렇게 비싼 거 써.”


화가 더 났다. 그럼 아줌마들은 아줌마니깐 필요한 거라도 비싸면 쓰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어떤 아줌마들은 강남 피부과 시술도 받고 몇십만 원짜리 LED 가면 같은 것도 사던데 정작 우리 엄마는 몇 만 원짜리 로션도 안 쓰겠다고 하니 화가 확 났다. 엄마도 소중하고 그만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는데 엄마는 왜 자기 자신을 그렇게 하대하는 걸까. 가뜩이나 내가 엄마에게 더 못 해줘서 미안하기만 한데 악의 없이 말하는 엄마의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고 나 때문에 엄마가 엄마 자신에게 더 필요한 걸 안 쓰나 하는 생각에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동안 유행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이일화 배우님과 라미란 배우님이 나오는데, 이일화 배우님이 맡은 역할은 빚더미에 앉은 가족이라 변변치 않은 화장품 하나 없어서 안 나오는 로션 통을 들고 낑낑거리며 마지막 남은 로션을 긁어 쓰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 나오는 라미란 배우님이 맡은 역할은 부자이기 때문에 새 화장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으로 푹 퍼서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는 장면이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이일화 배우님이 로션을 긁어 쓰는 장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라미란 배우님이 로션을 푹 퍼서 얼굴에 바르는 장면>


당시에 이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 엄마는 이일화 배우님 역할보다는 라미란 배우님 역할 쪽에 더 가까운 줄 알았는데, 엄마 말을 듣고 있자니 이일화 배우님 역할 쪽에 더 가까웠다. 아니 심지어 이일화 배우님이 맡은 역할보다 못하게 사는 것 같아서 너무 속상했다. 우리 엄마는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우리 엄마는 라미란 배우님이 맡은 역할하고 비슷할 거라고 자부했는데. 아니어도 한참 아니었다. 하지만 속상한 내 마음과는 달리 엄마에게 차분한 말 한마디 건네기보다는 엄마에게 또 화를 내며 한마디 던지고 말았다.


“엄마는 그럼 내가 나중에 결혼해서 아줌마 되면 그냥 로션도 안 바르고 쭈글쭈글해지면 좋겠어?”

“아니지! 그러면 안 되지! 아오. 알았어 알았어. 딸 제발 화 좀 내지 마. 알았어 알았어. 엄마 그냥 그 로션 사줘. 화내지 마. 응?”

“이제부터 엄마도 항상 좋은 거 쓰고 엄마도 내가 쓰는 거 써. 알았어?”

“어어 알았어. 아오 화 좀 그만 내. 알았어.”

“….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기다?”

“알았다니깐 알았어 알았어.”

“…. 엄마 내가 화내서 미안해…”

“아이고 괜찮아 괜찮아. 우리 딸이 엄마 사랑해서 그런 거 다 알아. 손님 왔다. 이따가 통화해 사랑해 우리 딸~”

“… 엉.. 나도 사랑해.”


결국,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엄마가 혹시나 마음을 바꿀까 봐 내 원피스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잽싸게 로션 먼저 주문을 했다. 그렇게 주문을 하고 나니, 이것 말고도 엄마가 나에게 이것저것 좋은 것, 예쁜 것 해주려고 엄마 자신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았을지 생각하니 속상했다. 엄마도 여자라 꾸미고 싶고, 엄마도 놀고 싶고, 엄마도 쉬고 싶을 때가 있었을 텐데.


28년 동안 엄마는 나를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건 다 포기하며 살았을까? 비단 엄마뿐일까. 아빠도 엄마처럼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거겠지. 눈치 없는 바보 딸.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너무 속상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더 효도하고 내가 더 많이 챙겨드려야지.


엄마 아빠. 내가 잘할게. 사랑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이일화 배우님이 로션을 긁어 쓰는 장면> &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라미란 배우님이 로션을 푹 퍼서 얼굴에 바르는 장면> 캡처 장면 출처: https://www.netflix.com/watch/81168752?trackId=14170287&tctx=2%2C0%2C9000a880-93cd-4f68-8776-ea5c600cf7d0-837028549%2Ce1cde9c1-f51e-432a-8050-655bbe95db91_49217035X3XX1607019065023%2C%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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