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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l 03. 2020

학생 돈키호테

#0."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넘버 가사 중...

“자 다들 일렬로 서서 한 명씩 오늘 읽은 책 줄거리 말해봐.”

 

뭔가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에게 들을 법한 말이지만 사실은 내가 초등학이 될 때까지 막내 고모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다.

 

부모님이 맞벌이 셔서 할머니가 내가 초등학이 될 때까지 부모님 대신 키워 주셨다. 그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와 우리 가족이 같이 살았고,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우리 집은 항상 큰 아빠들의 식구들과 고모들의 식구들로 북적북적하였다. 물론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외동인 나로서는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지만도 않았다. 특히 서울 대치동의 극성스러운 사교육 바람을 몰고 수원까지 오는 막내 고모가 오실 때는 더욱 그랬다. 고모는 나와 사촌들이 인형놀이를 하거나 놀이터에 가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몇 시간 동안 방에서 다 같이 입 벙긋 못한 채로 책을 읽게 한 후 우리를 일렬로 세워놓고 한 명씩 줄거리를 말하게 했다. 그 억압 속에 접했던 책 중 하나가 바로 “돈키호테”였다. 물론 그때 어린이였던 나는 "돈키호테"를 어린이를 위해 쉽게 쓰인 책으로 읽었다. 그 당시에 읽었을 때 “돈키호테”에서 나오는 주인공인 키하나는 나에게 그냥 정신 나간 주인공이었다. 책을 너무 읽어서 소설과 현실조차 구분하지 못해 미쳐버린 주인공이라니. 나는 이런 이상한 책 말고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데. 이런 내용은 어떻게 유명해 진건가 하고 궁금증을 품었을 뿐 딱히 읽을 필요가 없었던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부터 돈키호테라는 책은 그냥 “정신병에 걸린 주인공”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어렴풋이 마음에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책을 읽을 시간도 초등학교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대학교에 가기 위해 여느 중 고등학생들처럼 앞뒤 안 보고 책상 앞에 앉아서 숨 돌릴 틈도 없이 공부하랴 공부 외에 시간은 봉사 활동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꿈에 그리던 대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설렘 반, 두려움 반, 아니 설렘이 더 컸던 것 같다. 대학생이 아니었을 때는 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하였는데 나도 곧 그렇게 된다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만은 않았다. 도서관 곳곳마다 붙여져 있는 취업 관련 세미나와 가게에 붙여져 있는 “아르바이트 구함” 문구를 보며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어른이 된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 그리고 여기서 나가면 더 큰 어른들의 세계 내던져져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무서움만 커져 갔다.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행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그 기분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에게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하는 불안함과 다들 취업하고 나만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 취업을 해도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면 어떡하지 라는 별별 생각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듯했다.

 

“너 요즘 뭐 걱정되는 일 있니?”

“아니 왜?”

 

고민 있든 없든 항상 없다고 말씀드리지만 역시 내 목소리에 묻어져 나오는 걱정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너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서. 공부도 쉬엄쉬엄하고. 엄마 아빠는 네가 무엇을 하든 항상 자랑스러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어. 나쁜 일 하는 것만 아니면 엄마 아빠는 우리 딸이 뭘 하든 항상 자랑스러우니까. 딸. 응?”

“... 응. 알았어. 하여간 나 가야 해. 끊어”

“응. 잘 먹고 다니고 건강이 최고야. 사랑해. 딸.”

“…응 나도. 끊어.”

 

순간 울컥하여 카페에서 오열하고 싶지는 않아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쏟아지려 하자 카페 벽에 달린 광고 화면을 보며 눈물을 말렸다. 광고 화면에서는 항상 그렇듯이 뮤지컬 광고가 이번에는 “맨 오브 라만차”라는 뮤지컬 티저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는데 “세계를 감동시킨 불후의 명작 돈키호테가 이 세상에 전하는 삶, 희망, 그리고 꿈을 향한 외침”이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돈키호테라니. 내가 초등학 때 읽었던 그 정신병 걸린 주인공의 이야기가 뮤지컬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삶, 희망, 그리고 꿈을 향한 외침”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희망"이니 "꿈"이니 뭔가 사치스러운 단어들 같았다. 하지만 나오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아까까지만 해도 감정에 북받쳐서 나오려는 눈물은 쏙 들어가고 어느새 나는 "맨 오브 라만차"가 어떤 뮤지컬인가 찾아보고 있었다. 때마침 끝나가는 뮤지컬이라 50% 할인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한번 볼까... 뭔가 기분 전환할 것이 필요해..'

 

다행히 진행하고 있는 실험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고, 게다가 다음날 당장 급하게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우중충한 내 기분을 전환하고자 다음 날 표를 덜컥하고 구매해 버렸다.


나는 급하게 구매한 표를 매표소에서 찾은 뒤 뮤지컬을 보기 위해 내 자리를 찾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뮤지컬이라 그런지 나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아지랑이 같은 기분을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가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좀 어둡고 하다가 웃긴 장면도 나왔는데 중간쯤에서 돈키호테 역을 맡은 배우가 부른 노래 중에 “Impossible Dream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가사를 들으며 머리를 한 대 맞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텁텁한 입안에 민트를 씹은 듯 상쾌한 기분도 들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 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길이오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넘버 Impossible Dream 중>

 

돈키호테는 미친 사람 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돈키호테는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꿈”에 미쳐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다. 꿈이 실현될지 안될지 가능성만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단 돈키호테는 열심히 최선을 다한 것이다. 나처럼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떡하지 안절부절못하며 시작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사실 아직 난 학생일 뿐인데. 무엇을 제대로 해보지도 않은 채로 나에게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만 전전긍긍하다니. 시작도 하기 전에 부러지고 내던져질까 봐 남들이 비웃을까 봐 고민하는 꼴이라니.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다시 생각했다. 지금부터라도 긴 여정을 돈키호테처럼 걸어가 보자고. 돈키호테처럼 남들 시선에 상관없이 나아가 보자고. 한번 돈키호테처럼 해보자고.



이 글은 몇 년 전 학생일 때 써놓은 글입니다 :)

커버 이미지 및 본문 이미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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