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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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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Jan 29. 2020

11. 내 한 몸 건사하면 될 줄 알았는데

퇴사와 여행, 그 후

퇴사를 한 지 2년이 훌쩍 넘었다. 2017년 9월에 마지막 출근을 했으니 햇수로는 4년이나 된 셈이다. 퇴사 당시 모아놓은 돈으로 이 정도 지속할 만큼은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현재까지 버티고 있다. 그 사이에 길고 짧은 해외여행 및 국내여행도 틈틈이 다니고, 나름대로 이것저것 해보고 싶던 일들을 배웠는데도 말이다.


퇴사 후 일 년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온전한 학생으로 보냈고, 수료 후에는 영어 공부와 여행 준비를 하고 장기여행을 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서는 계속 줄어만 가는 통장 잔고를 (드디어) 견딜 수 없게 됐다. 그 뒤로 틈틈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정기적으로 일한 시간이 반년 정도는 주 4시간(일 4시간이 아니다), 또 한 10개월 정도는 주 8시간. 가끔은 단기 알바를 하기도 했고, 예상외의 수입이 있기도 했다. 그 정도 일해서야 잔고가 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통장이 비는 속도를 좀 줄이거나 현상 유지를 시켜주었다.


내가 퇴사를 하기 전엔, 퇴사를 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으로, 가끔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퇴사 후에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곤 했다.  거칠게 보면 생활은 수입과 지출의 반복이 아닐지. 퇴사 후의 생활 이해에 도움이 될까 하여 백수 기간 중의 수입/지출을 공유해보기로 한다.


[수입]

- 단기 근로 : 논술 시간강사(주 4시간 혹은 주 8시간, 총 3학기),  글쓰기 과외(한 달), 책 관련 강의(2회), 설문/인터뷰 채록/설문내용 타이핑(1~2주씩 서너 번), 고등학교 캠프 인솔(1일), 대학생 해외 캠프 답사 및 인솔(2주), 공연(1회)-마을학교에서 단기로 구성된 청년  아마추어 밴드로 마을에서 공연 후 소액 수령, 음성 녹음

- 인세 : 여행 에세이 인세(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다음 여행의 비행기 값도 다 충당하지 못함)

- 학술지원금 : 학술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연구비(논문 작성비) 지원

- 중고 물품 판매 :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 일부, 당근 마켓을 통한 소모품, 집 앞 금은 구매 아주머니께 안 쓰는 반지 등

-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실업급여가 있다. 나는 일하기 시작한 이래로 퇴사한 적이 여러 번이기 때문에, 은근히 실업급여받으며 놀고먹는(=세금 축내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발적 퇴사였기 때문에 못 받은 적이 다수였고, 받더라도 한 번은 8일, 또 한 번은 2개월 만에 다시 일을 시작했기에 평생 받은 실업급 여래야 석 달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재단에서 스스로 나와 받진 못했다. 그런데 의외로 최근 주 8시간 일한 학교에서 고용보험을 가입했던 터라 계약 만료로 나오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다만, 단시간 근로라 1일 수령금이 소액)


[지출]

 '근검절약해서 오래 백수 하기'가 모토였기 때문에 돈을 많이 쓴 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소소소 소확행으로서  1일 1 커피 정도가 일상의 사치랄까.

통신비, 관리비, 교통비, 식비 등의 기본 생활비 외에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한 것은 여행경비이다. 해외로는 뉴질랜드, 호주 일본, 중국(청도),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를 국내로는 제주(3회)를 비롯해 국내 곳곳을 거의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돌아다닌 듯하다. 등산도 종종 했다.

그 외 지출은 배우고 하고 싶은 일들에 썼다. 살사, 줌바, 드로잉, 피아노, 인디자인과 일러스트, 뜨개질, 글쓰기 모임, 명상(브레인 코칭) 등. 언제나처럼 호기심이 있던 장르긴 했지만 대부분 다음 여행이나 출판에 써먹으려 한 속셈도 있었다. 앗, 그리고 논문 작성에도 돈이 든다.


이럭저럭 하여 현재까지 버티고 있고, 이런 식으로 계속 백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남편도 아이도 없는 나로서는, 내 한 몸 건사하기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을 들었다. 도자기를 굽는 어떤 분이 도자기 1000개를 의뢰받아 몇 달을 고생하여 납품하여 돈을 받고는, 엄마에게 가방을 한턱 쏜다는 얘기였다. 그분은 사연 말미에 '이 맛에 돈을 번다'라고 했다. 비슷한 말을 다른 곳에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내 지도교수님은 질풍노도의 제자를 어르고 달래 가며 내 논문을 지도해주셨는데, 늘 만날 때마다 고기며 맛있는 음식들을 사주시곤 하면서, '취직해서 좋은 것이 이렇게 밥을 사줄 수 있어서'라고 말을 하시곤 했다.


나누고 베풀기 위해 돈을 번다는 사람들 앞에서 내 한 몸 책임지니 그만이다 하는 마음이 참 알량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며칠 전 친구가 남편이 승진해서 밥을 사는 걸 보며, 한 턱 낼 이유야 나 역시 박사 논문을 통과했으니 있었겠다며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더구나 올해는 엄마도 칠순이시고, 동생이 아이를 낳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 자신뿐 아니라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을 살피고 챙길 줄 알아야 함을 나는 간과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만, 돈을 벌긴 벌어야겠구나 싶어 진 것.


그렇다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진 않았다. 당장 올해 생일에 맞춰 3월에 항공권을 끊었고, 3월에 나가 논다는 건 학교 중심으로 생활하는 나에게 1학기는 내내 쉰다는 말이니까. 아마도 백수 기간은 만 3년을 채우고야 끝이 날 듯하다. 이번 실업급여 아니 구직급여는 정말이지 구직을 위해 사용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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